[편집자레터] 유럽의 헌책방이 부러운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세계 최초의 책마을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헤이 온 와이입니다. 1962년 리처드 부스가 성을 사들여 헌 책방을 크게 연 게 그 출발이었지요. 인구가 1300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 40여개의 헌책방이 모여있는 이 곳은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됐습니다. 연간 책 판매량이 100만 권이 넘고 주민 전체가 헌책방을 중심으로 생활을 꾸려간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호텔·민박집 등도 호황을 맞았으니까요. 헤이 온 와이의 성공을 모델 삼아 프랑스·독일·스위스 등 유럽 전역에 책마을이 조성됐습니다.

책마을은 여기저기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최초의 책마을인 베슈렐의 경우 땅값이 많이 올랐답니다. 한때 대마(大麻)를 꼬아 짜는 선박용 밧줄의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베슈렐은 1960년대 이후 전국적인 농촌 대탈출 바람으로 몰락일로에 놓여 있었다지요. 4만5000유로였던 500평방미터 땅이 책마을 조성 이후 10년 만에 20만 유로로 치솟았답니다. “프랑스 시골에서 이런 상승 폭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저자인 미술평론가 정진국씨의 설명입니다.

서점 33곳이 모여있는 벨기에의 책마을 르뒤. 주민 400명인 이 작은 동네에 지난 한햇동안 20만명의 외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대도시로 떠나는 청춘들을 붙잡을 묘책이 없었던 르뒤가 이제 젊은 연인들의 주말 데이트 코스로 자리잡았답니다. 서점가의 식당에는 앉을 자리도 없다니, 축하해줄 일입니다.

책마을은 도시생활에 찌든 ‘먹물’들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불안정한 고용환경과 살벌한 생존경쟁에 넌더리가 난 지식인들이 책마을로 내려와 서점을 낸 것이지요. 책에 기대 문화생활과 생계를 함께 꾸려갈 수 있으니, 그만큼 솔깃한 직업도 없었을 겁니다. 정착한 지식인들이 정체된 농촌사회에 활력이 된 것은 당연했겠지요.

고사 직전이었던 우리나라의 헌책방 문화도 꿈틀대고 있습니다. 파주 출판단지와 서울 광화문·신촌 등에서 아름다운 가게가 운영하는 헌책방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고, 지난 2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중고샵’코너를 만들면서 헌책 사고 팔기는 더욱 손쉬워졌지요. 새 책을 팔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헌책방을 통해 책이 ‘반짝 소모품’이 아닌 주인을 물려가며 읽을 만한 ‘가치’란 인식이 확산된다면, “갈수록 불황”을 호소하는 출판계에 보약이 되지 않을까요. 

이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