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3. 최초의 뮤지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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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공연보다 앞서 발매된 앨범 ‘살짜기 옵서예’.

 길옥윤 선생에게 술은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반면 그 술은 우리 결혼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결혼 초기부터 시작된 불화의 원인은 99%가 술이었다.

나는 길 선생과 결혼하기 전에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사람을 주변에서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흥이 넘쳤던 아버지도 술은 단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는 분이었다. 오빠들 중에도 술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 미8군 쇼단에서 활동할 때는 물론 술과 도박의 도시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일할 때도 술 자리는 의도적으로 피했던 나였다. 무엇보다 술은 내 체질과 맞지 않았다. 또 내 노래와 목소리를 위해, 그리고 가수로 대성하는 데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일은 철저히 멀리하겠다고 마음 먹고 실천해왔기 때문에 술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화가 싹텄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행복했다. 1966년 귀국 직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5~6년은 내 가수 인생의 최고 절정기였다. 내는 앨범마다 두세 곡씩 히트했을 뿐 아니라 큰 공연을 열 때마다 연일 매진에 매진을 기록했다.

당시 시민회관이라 불리던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은 대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언제든 대관을 해주는, 이름 그대로 시민을 위한 시민의 문화회관이었다. 시민회관 하루 공연 횟수는 네 차례였다. 말이 쉬워 4회 공연이지 지금 대부분의 가수가 사나흘간 하루 1회 공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요즘 가수가 며칠 동안 쏟아 부을 에너지를 나는 하루 만에 다 쓰는 격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4회 공연에서 피날레 곡으로 ‘파드레’를 부르다가 막이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무대 위에 주저앉아 쓰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사그라질 듯 주저앉는 내 모습을 본 관객들 중에는 피날레 곡인 만큼 그것도 멋이려니 하고 생각했을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공연보다 당시 내 가슴을 벅차게 했던 것은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와 ‘대춘향전’이었다. ‘살짜기 옵서예’는 길 선생과 결혼을 앞둔 66년에, 그리고 ‘대춘향전’은 딸 정아를 임신했을 때인 68년에 각각 공연했다.

특히 ‘살짜기 옵서예’는 브로드웨이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뮤지컬 배우의 꿈을 내 나라에서 이룬 첫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초연에서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결코 잊을 수가 없다.

66년 10월 26일부터 일주일 동안 예정되어 있었던 그 공연을 위해 정말이지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온몸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스태프 및 출연진들과 하루 12시간 이상 연습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또렷하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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