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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웬 폭포 … 길에 마술을 거는 미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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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줄리안 비버의 작품들. 윗쪽부터 ‘급류타기(White Water Rafting)’ ‘개구리와의 만남 (Meeting Mr Frog)’ ‘수영장(Swimming Pool)’. 두 번째 작품은 비버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개구리와 마주 앉은 꼬마아이는 그의 딸이다. ‘수영장’은 그의 첫 작품으로, 들어올린 것처럼 보이는 여성의 다리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그렸다. [사진=줄리언 비버 홈페이지]

줄리안 비버가 3일 자신의 작품 ‘이륙’ 앞에 포즈를 취했다. 그가 지정한 위치에서 촬영하지 않아 그림이 별로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진=안성식 기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도시의 빌딩숲 한가운데 물길이 생겨 급류가 흐른다. 고무보트를 탄 남자가 ‘악~’ 소리를 지르며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를 젓는 다. 실물처럼 보이지만 이 중 진짜는 사람 뿐이다. 물도 고무보트도 영국 작가 줄리안 비버(49)가 바닥에 그린 입체그림이다. 사람의 뇌가 일으키는 착시현상을 이용해 평면에 3차원(3D) 입체그림을 그리는 비버가 한국을 찾았다. 영국·프랑스 등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가 아시아를 찾은 것은 일본·싱가포르에 이어 세 번째다.

한국에 남기는 작품 제목은 ‘이륙(take-off)’. 그는 “ 주제는 고객 의견을 따른다”며 “이번 작품에선 인천국제공항에 이달 입점한 신라 면세점의 새출발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3일 만난 그는 가로 3m, 세로 4.5m 넓이의 신라면세점 로비를 캔버스 삼아 작업 중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어수선한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길 에서 그림을 그리는 건 자유롭기 때문이다. 예전엔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않나.”

미술을 공부했지만 그는 원래 영어 선생님이었다. 취미 삼아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유명인의 초상을 길바닥에 그린 것이 영국의 가디언 등에 보도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업작가가 됐다. 평면이던 그림을 입체로 바꿔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우연히 떠올랐다. 네모난 타일이 깔린 광장에서 “타일이 둘러싼 사각형의 공간을 수영장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수영장 안에 여성이 수중발레 하듯 다리를 들고 있는 그림이 첫 작품이다.

“뇌가 깊이와 거리를 착각해서 입체적으로 인식하도록 속이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각도와 위치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첫 작품이라 실수가 많았다.”

3D 그림이 언뜻 봐선 실망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가 의도했던 위치와 각도가 아닌 곳에서는 형태가 찌그러지고 뒤틀려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린 작품이 수십 점. 눈속임을 이용한 그의 그림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놀랍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BBC는 그를 가리켜 ‘거리의 피카소(pavement Picasso)’라고 보도했다.

“피카소 가족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웃음)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피카소가 아니라 모네다.”

하지만 세계적인 유명 화가가 된 그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분필로 그리기 때문에 특수 처리를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없어진다는 게 치명적 약점이다.

“완성된 작품의 사진을 찍는 이유다. 존재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즐기는 걸로 충분하고, 사라지면 사진을 보면서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낀다.”

사실상 그의 작품이 진짜로 완성되는 것은 사진으로 찍혔을 때다. “사람이 그림 속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입체그림의 진짜 매력”이라는 그의 말처럼 무엇이 실물이고, 무엇이 아닌지 혼란스러운 순간에 작품은 완성된다. 그는 늘 익살스런 자세와 표정으로 그림 속 인물처럼 사진 속에 등장한다.

그처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3D 화가는 여럿이다. 그 중 비버는 쿠르트 베너, 에드가 뮐러와 함께 3대 입체화가로 꼽힌다. 다른 작가들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해달라는 말에 비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 이유는 창작력이 훼손될 우려가 있 고, 나보다 훨씬 잘해서 마음이 상할까봐 그렇다. 하하하.”

길에 그림을 그려 자유를 느낀다는 그는 작품을 얼마든지 퍼나르고 즐겨도 좋다고 했다. 또 갤러리의 틀 밖에서 활동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나 스스로가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해진 사람 아닌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덕에 다른 재능있는 작가들에게도 나처럼 기회가 열릴 거다. 갤러리에 가지 않고도, 음악회에 가지 않고도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보여준 것 같아서 뿌듯하다.”

글=홍주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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