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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항하는 경제, 오일달러로 가속도 붙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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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18면

모스크바 중심부에 건설되는 비지니스 파크에선 요즘 비 온 뒤 죽순이 자라는 것처럼 고층 건물들이 쑥쑥 올라가고 있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곳은 러시아 최대 부동산 재벌 ‘미락스 그룹’이 세우고 있는 연방타워(Federation Tower)다. 연면적 42만2000㎡(약 12만7000평)의 이 건물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448m를 자랑한다. 두바이에 세워지는 160층짜리 ‘버즈 두바이’(높이 623m) 빌딩에는 미치지 못하나 러시아 경제의 부흥과 오일달러의 위력을 말해주는 상징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유럽 최고층 빌딩, 新귀족층 10만 명, 세계 3위 외환보유액…

요즘 모스크바 시내는 거대한 건설현장을 방불케 한다. 국내외 기업들의 사무실 수요에다 상가·아파트 공급이 달려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개발 열풍이 불고 있다. 그 바람에 건설자재 가격은 최근 18개월 동안 평균 150%나 급등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미락스 그룹의 세르게이 폴론스키 회장은 러시아의 부동산 재벌로선 처음으로 경제 전문지(誌) 포브스가 올해 선정한 10억 달러 이상의 부호 명단(총 793명)에 포함됐다.

고급 쇼핑가에서도 러시아인의 두둑해진 지갑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한다. 모스크바 중심가 예브로페이스키 쇼핑센터에는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이곳에는 자라(Zara)·몬순(Monsoon)·톱샵(Top Shop)·오아시스(Oasis) 같은 명품 가게와 디자이너가 직접 만드는 부티크, 보석가게들이 즐비하다. 러시아는 2002년부터 4년간 사치재 소비 규모가 106%나 급증했다. 서방 세계에선 “러시아의 신흥 부호는 1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고급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신(新)귀족층으로 분화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현 수준을 유지하는 한 러시아는 2015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소비재 시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라는 지방에서 출발한 수퍼마켓 체인 ‘마그니트(Magnit)’는 최근 3년간 2000여 개의 점포를 연 초대형 유통업체로 부상했다. 마그니트의 창업주 재산은 지난해 2억 달러에서 올해 19억 달러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광경들은 10년 전 러시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경이다. 1990년대 후반 외환보유액은 바닥나고 물가상승률은 1999년 36.5%에 이르렀다. 당시 실질소득은 러시아연방이 출범한 91년에 비해 40%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인 세 명 중 한 명은 절대빈곤 수준으로 떨어져 고통받았다. 관료주의·부정부패·조직범죄가 기승을 떨며 체제 위기감은 극도에 달했다.

하지만 푸틴 시대가 개막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바로 국제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에 힘입어 경제가 선순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일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경상수지·재정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건설경기 호황, 내수 확대, 외국인 직접투자(FDI) 촉진의 결과를 낳았다. 2006년 러시아가 에너지(원유·천연가스·석탄)와 천연자원(철강·목재·희귀금속 등)을 팔아 번 돈은 전체 수출(3020억 달러)의 80% 안팎에 이를 것이라고 대외경제연구원(KIEP)은 추정했다.

러시아는 2000년부터 연 6∼7%의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외환보유액은 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3월 말 현재 5300억 달러)를 자랑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호황은 에너지 가격의 급등에 의존한 거품 현상일 수 있다”며 “내수·제조업·금융 분야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기 호황에 힘입어 러시아 증시의 시가총액은 99년에 비해 22배나 증가한 1조33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멕시코·인도·한국보다 더 큰 규모다. 구매력을 감안할 때 러시아 경제는 GDP 규모에서 이미 이탈리아·프랑스를 따라잡고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됐다는 자체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강한 러시아’를 과시하는 장(場)으로 활용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러시아는 고르바초프의 집권 기간(85∼91년)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소련 해체, 사회주의 붕괴를 맞았다. 급진개혁 노선을 펼친 옐친 시대에도 경제는 만신창이였다. 푸틴은 올 2월 주재한 경제전략회의에서 “집권 8년간 실질소득은 2.5배 늘었고 실업률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푸틴은 2003년 러시아 최대 민간 석유회사 유코스(Yukos)의 호도로코프스크 회장을 구속시키고 이 회사를 청산했다. 경제 분야에 대한 국가 통제를 더욱 강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정경유착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푸틴 정부는 석유·가스, 물류 관련 인프라, 전력 분야를 국가전략산업으로 통제해 왔다.

러시아는 개혁·개방을 가속화하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계획이다. 2006년 11월 미국과 양자 협상을 끝내고 무역·투자 장벽을 낮추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산품 관세율을 8% 수준(현재 12∼14%)으로 낮추고 서비스 시장 개방 확대, 농업 보조금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연합(EU)·한국 등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의 시장 쟁탈전은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미·중·유럽은 무역·투자와 에너지 협력을 연계해 러시아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경협 상대는 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 같은 EU 회원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에너지(석유·천연가스·전력) 협력은 물론 시베리아·극동지역 개발, 국경무역 활성화, 방위산업·첨단기술 개발 등을 공동 추진하고 있다. 천연가스 매장량 1위, 석탄 매장량 2위, 원유 매장량 8위라는 놓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러시아를 향한 발길은 더욱 분주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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