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러시아는 잊어라 새로운 북방외교 펼칠 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호 16면

1998년 8월 러시아는 외환보유액이 바닥나 모라토리엄(대외 지불유예)을 선언했다. 대외채무를 더 이상 갚을 수 없는 국가부도 사태였다. 아시아 금융위기 때문에 한국도 뼈아픈 구조조정을 하던 시기였다. 우리 사회의 시각은 싸늘했다. 한·소 수교(90년 9월) 당시 경협차관으로 제공한 14억7000만 달러의 상환을 압박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모스크바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거대시장 개척의 꿈을 접고 짐을 쌌다. 공들인 북방외교의 한 축이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주인 바뀌는 크렘린

그로부터 10년 후. 러시아는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일원으로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98년 배럴당 20∼30달러였던 국제유가가 최근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오일 달러가 연 2000억 달러 넘게 쏟아져 들어온 덕택이었다. 러시아의 원유 매장량은 795억 배럴(한국 소비량의 99년분)에 이른다. 천연가스 매장량은 전 세계의 27%(47조㎥)나 된다.

러시아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중국과 연대해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하고 있다. 미사일방어(MD)체계 확산, 코소보 독립, 이란 핵문제, 나토 확대 등에 이미 제동을 걸었다. 무엇이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를 되살리고 있는가. 에너지 자원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국가 보안위원회(KGB)출신인 푸틴의 철권통치였다. 푸틴은 개발독재 모델을 답습하면서 ‘슬라브 민족의 부흥’을 외쳤다. 그 과정에서 야당을 탄압하고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을 손보고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푸틴은 7일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 메드베데프에게 권력을 넘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푸틴 총리’라는 초유의 정치실험을 강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 시대의 연장일지, 메드베데프 시대의 개막일지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올 2월 발표한 ‘2020 발전전략’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국정 로드맵이 될 전망이다. 그때쯤 러시아는 미국·EU·중국에 필적하는 경제력을 자랑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의 동진(東進) 전략이다. 시베리아에 매장된 원유·가스를 한·중·일에 팔고, 낙후된 극동 지역을 개발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중의 세력 다툼이 한창인 동아시아에서 발언권을 높이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반영하듯 북·러 관계는 순항하고 있다. 안보든 에너지든 시베리아에서 부는 북풍은 한반도를 향해 몰아치고 있다. 러시아를 보는 시각부터 싹 바꾸고 새로운 북방외교를 시작할 시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