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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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침.아버지 서재를 청소하다 유리 히아신스를 발견했다.책상 위의 어머니 사진틀 앞에서였다.
엊그제만 해도 분명히 창문턱에 놓여 있었는데 언제 이 자리로옮겨진 것일까.아버지의 손길을 느꼈다.
어머니 모습에 헌화(獻花)라도 하듯 놓인 유리 히아신스 꽃바구니는 많은 것을 아리영에게 말해 주는 것같았다.
해마다 계속해온 알뿌리 가꾸기까지 잊은 아리영의 방황을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보면서 몰아세우는 일을 삼갔다.부부간의 갈등이란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하기 전엔 해결되기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헌화」의 사연은 또 한가지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뭔가 사죄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정여사에게 급커브를 그으며 기울어져 가는 마음을 이젠 감당키 어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틀 옆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전엔 보지 못했던 상아조각함이었다.하얀 살결에 당초(唐草) 문양과 기하학적(幾何學的)문양의 아라베스크 무늬가 정교하게 아로새겨져 있다.인도의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갈색 가죽의 도장 주머니가 보였다.아버지 도장일 것이다.무심코 뚜껑을 되덮으려다 어쩐지 도장만큼의 부피같지 않아 주머니 안을 살펴봤다.까만 잠두콩 말린 것 비슷한 알한 개가 들어 있었다.
뭔지 알 수 없다.무슨 약 같기도 하고,나무열매 같기도 했다. 『어머니 사진 옆의 상아함 안에 깜장 콩알 같은 것이 있던데요.그게 뭐예요,어버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물었다.
『아,그거….』 아버지는 약간 무안한 듯이 웃었다.
『네 어머니한테 받은 거야.메추라기 염통이란다.』 『메추라기염통?』 『응.호주머니 속에 늘 가지고 다니라더군.네 어머니 돌아간 후로는 옷갈아 입을 때마다 주머니를 내 손으로 옮겨 넣어야 하니까 제대로 챙겨지지가 않더군.그래서 아예 함 안에 모셔 두기로 했지.』 메추라기 알이라면 기억나는 일이 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멋진 비방(비方)』.
보스턴의 작은 고서점에서 산 책에 메추라기 알을 이용하는 사랑의 비방도 있다고 어머니는 일러주었었다.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13세기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요 철학자다.
마편초 강즙을 손에 문지르고 사랑받고자 하는 상대를 만지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비방을 일러준 마그누스는 메추라기 알 이용법도 적어놓은 것이다.
자상한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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