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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얘들아, 티끌 속에도 생명이 있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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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눌루랄라’라는 숲에 사는 코끼리 호튼은 섬세하고 정이 많다. 어느 날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작은 티끌에서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는다. 호튼의 큰 귀에는 들리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다.

알고 보니 이 티끌은 누군지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사는 ‘누군가 마을’(Whoville)이란다. 다른 동물들이 티끌 속에 이런 마을이 있을 줄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도 자신들이 티끌처럼 작은 세계에 사는 줄은, 그 바깥에 호튼이 사는 커다란 세계가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본래 한곳에 머물고 있던 티끌이 이리저리 움직이게 됐으니, 마을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위기를 직감한 사람은 오직 마을의 시장뿐. 시장과의 대화를 통해 사정을 알게 된 호튼은 티끌을, 다시 말해 마을을 안전한 곳에 옮겨놓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호튼’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안심하고 선택할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알록달록하면서도 부드러운 색감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호튼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에도 생명이 있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는 말로 직접 하기는 어려워도, 어린이들과 나누고 싶은 깨달음을 훌륭하게 전해준다.

‘호튼’은 부모와 아이가 함께 보기에 적당하다. 어른 관객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마을사람들의 촘촘한 솜털까지 너끈히 묘사하는 애니메이션 기술이 눈에 들어올 법하다. 호튼을 훼방 놓는 대머리 독수리의 부리를 매끈한 질감으로 묘사한 솜씨도 눈에 띈다. 먼 거리에서 시작해 아주 가까운 곳까지 카메라를 단숨에 움직이는 역동적인 연출 역시 수준급이다.

드라마적인 재미로 돌아간다면, 역시나 제작진이 겨냥한 것은 어린 관객들이다. 좀 더 공공연한 상징으로 발전될 법한 대목들을 ‘호튼’은 원작동화의 분위기를 넘어 구체화하려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호튼의 모습이 어린 동물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엄마 캥거루, 닥쳐올 위험을 대비하는 대신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을사람들 등등, 어른들이 이리저리 해석할 법한 설정이 등장하되, 어린 관객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준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호튼’은 동화작가 테오도어 수스 가이젤의 1957년작 동화가 원작이다. ‘닥터 수스’라는 필명으로 이제는 국내에도 널리 소개돼 있는 그의 작품은 앞서 ‘그린치’(2000년), ‘더 캣’(2003년) 등의 실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두 실사영화가 다소 그로테스크한 맛을 냈다면, ‘호튼’은 본래 어린이용인 원작의 눈높이에 가장 적당하게 만들어진 듯 보인다.

‘호튼’에는 원작에 없는 대목도 있다. ‘누군가 마을’의 구체적인 묘사는 온전히 이 애니메이션이 창작해낸 몫이다. 이상한 것은 원작동화에 없던 시장의 가족들을 등장시키면서, 시장을 96명이나 되는 딸을 두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낸 점이다. 시장 가문의 남자들이 대대로 시장직을 물려받는다는 설정인데, 양성 평등의 눈높이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 대목이다.

국내에서는 어린 관객들을 겨냥해 한국어 더빙판 위주로 상영될 예정이다. 미국에서 짐 캐리(호튼)와 스티브 카렐(시장)이 연기했던 목소리를 국내에서는 차태현·유세윤이 각각 맡았다. 한국어 대사에 방송용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5월 1일 개봉. 전체 관람가.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줄거리를 보고 어른 관객들이 머리에 떠올릴 법한 상상이 ‘호튼’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누군가 마을’을 아주 작은 세계로 여기는 호튼의 세계 역시 이 우주로 눈을 넓히면 아주아주 작은 점, 하나의 별일 따름이라는 바로 그 상상 말이다.  

이후남 기자

주목! 이 장면육중한 체격의 호튼이 티끌을 안전한 곳에 운반하기 위해 낭떠러지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게 된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다리를 건너면서, 호튼은 자기최면을 걸기 시작한다. 난 가벼워, 깃털보다 가벼워, 공기보다 가벼워. 호튼은 볼에, 아니 온몸에 가득 바람을 불어넣고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는다. 시각적인 표현력에서는 이보다 매력적인 장면도 많지만, 호튼의 캐릭터를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유머감각은 역시 이 장면에서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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