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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세력을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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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계는 전진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먼 옛날로 돌아가고 있다. 삼국지와 초한지 시대의 전투 장면이 21세기 우리의 정치 현실로 재현되고 있다. 대치 중에 한편 장수가 적군 장수를 잔뜩 성나게 만든다. 그리고는 몇 합을 겨루다가 짐짓 몰리는 척하면서 말머리를 돌려 급히 도망간다. 이윽고 자기편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심산유곡까지 상대편 군사가 정신없이 쫓아오면 순식간에 포위하고 협살한다.

지난해 대통령의 재신임국민투표 발언 이후 탄핵 정국에 이르기까지가 어찌 그리 삼국지 시대의 전쟁과 똑같은가. 적장의 놀림에 분을 참지 못한 한 장수(민주당)가 '탄핵'의 돌격전을 감행하려 하자, 옆의 장수(한나라당)가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총선에 이용하려는 수법에 말려들지 말자"며 신중한 척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기자회견으로 분기탱천한 야당 동맹군은 끝내 탄핵의 깊은 골짜기까지 추격하고 말았다. 이후 노사모를 비롯해 공영TV 라디오방송군, 시민단체연합군, 대학생군, 주부군, 일부 지식인군, 네티즌군 등이 사방을 에워싼 100만 대군이 돼 야당을 공격하고 있다. 이 전투 장면은 야당의 총선 함몰을 결과로 종식될 것이다.

다른 나라가 미래를 위한 전략을 추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친노.반노의 싸움으로 서로를 증오하며 흥분하고 있다. 총선을 향한 작전은 있으나 미래를 준비하는 나라의 중심은 없다. 결국 이러한 전쟁놀이의 짐은 우리 국민이 지고 가야 할 것이며, 그 멍에는 이 나라가 안고 가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노버트 엘리아스는 세계 문명사의 장기적 변동을 연구하면서 매우 흥미 있는 고찰을 했다. 한 사회 내에서 각각이 추구하는 방향을 놓고 두 집단이 싸우지만, 사회는 두 집단 모두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나라 안의 권력을 놓고 다투던 세력들의 도전과 응전은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조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19세기 중반의 일본. 도쿄(東京)만에 흑선이 들어왔을 때 일본은 변화를 위한 절박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지배세력은 막부가 중심이 돼 개화하자고 했고, 그 반대세력은 천황을 중심으로 외세를 물리치자고 했다. 한편에서는 개화를 하되 개혁은 하지 말자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개혁을 하되 개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 두 과거세력 간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일본의 미래를 활짝 열어줄 미래세력이 형성됐다. 그들은 개혁과 개화를 동시에 이뤄야 하는 역사적 숙명을 실현하기 위해 메이지(明治) 유신을 단행하고 불과 몇십년 안에 일본을 세계적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이 나라에도 대전환점이 필요하다. 19세기의 일본인들이 해냈던 일을 21세기의 우리도 해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낡은 시대를 허물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역으로 당당하게 등장해야 한다. 과거세력끼리 벌이는 싸움의 한편이기를 거부해야 한다. 19세기 우리의 선조들과 달리 이 시대의 참다운 개혁과 개방을 이룩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나라 젊은이들의 용솟음치는 에너지가 과거세력의 편 가름에 소모되지 않고, 거리의 엑스트라로 낭비되지 말아야 한다. 창의성과 역동성으로 세계를 지향해 이 나라를 바로세우는 주역이 돼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의 저 높은 참여의식이 증오와 타도가 아닌 새 시대의 주인의식으로 승화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밝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낡은 시대는 가고 순수한 국민적 에너지가 미래를 향해 결집되는 새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점화할 영웅은 없는가.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