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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회장님이 이명박한테 홀리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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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총리와 경제주체들이 저녁을 겸한 간담회를 갖고 있다(오른쪽 둘째 옆모습부터 조중훈 회장, 정주영 회장, 김종필 총리, 구자경 회장).

이춘림 전 현대그룹 고문은 현대건설 사옥이 광화문 동아일보 옆에 있던 시절이 아닌 삼화빌딩에 있을 때부터를 회고하는 셈이었다. 그만큼 현대의 가장 오랜 역사부터 기억에서 꺼내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행 본점 자리인데, 조선호텔 바로 옆에 삼화빌딩이라고 있었어. 거기 5층에 현대가 있었어요.”

-현대건설의 진용이 제대로 갖춰지는 것은 60년부터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건설회사의 진용이 제대로 갖춰졌다고 말한다는 건 참 구분 짓기 어려워요. 건설의 범위가 무한대에 가깝고 어떤 건설을 하느냐에 따라 진용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그건 기준이 없는 거니까. 다만 현대건설이 정주영 회장님을 중심으로 친인척들이 이끌어오다시피 했는데 공채를 하면서 빨리 인적자원을 확보했고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게 다른 업체들하고 큰 차이점이고. 그런데 특히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현대건설의 문화처럼 돼 있고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절대 하루아침에 내쫓고 불러들이고 그런 게 없었다는 거. 일류대학을 나왔는데 생소한 ‘노가다판’에 집어넣으니까 본인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해서 나가는 건 몰라도 다른 사기업들처럼 회장 눈에, 사장 눈에 찍혔다 해서 내쫓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그건 뭘 얘기하느냐, 명예회장님이 인적 소중함을 굉장히 중시했다 그거예요. 어떤 결점이 있더라도 회사에서 가르치고 깨닫게 해서 인재로 키워야지 마음에 안 든다고 내보내면 젊은이가 어디 가서 인재로 크겠느냐 이거야. 회사도 손해고 국가도 손해다 그거지요. 그 대신 절대 공채가 원칙이다 그거예요. 참 철학이 있는 어른이야.”

정주영 회장 공채 출신에 애정

-원래 명예회장님이 한 번 인연을 맺으면 그 사람이 배신하지 않는 한 버리지 않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게 정확한 표현일 거야. 고령교 할 때도 보니까 김영필씨라고, 그 양반은 나중에 자기 회사를 만들어 나가셨지만 그분하고 한계문, 최기호씨, 그런 분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했더니 명예회장님이 광산에서부터 같이 일했다는 거예요. 그때 회사 입장에서 보면 토목에는 김영필씨가 전무로 계셨고 건축에는 서승구씨라는 분이 상무로 계셨으니까 제법 진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서 보듯 광산 하실 때가 언제요, 해방 전 아니에요? 그런데도 본인들이 나가지 않으면 끝까지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60년대가 되고 신입사원들을 공채해도 ‘너는 현대 귀신이 돼라. 뒤는 내가 책임질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거지요.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

-60년대에 벌써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래서 그게 현대의 문화처럼 됐어요. 알음알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미 부장, 이사 다 됐으니까 현대건설이 어떤 회사다 하는 걸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공채로 들어온 사람들한테 자상하고 무척 애정을 보여요. 하여간 인재를 상당히 뽑았는데 연도별로 볼 때 1960년에 임형택이가 들어왔고 61년에 권기태하고 좀 많이 들어왔어요. 건축, 토목, 기계, 정비 쪽으로. 62년에도 김광명, 최동식 같은 이가 들어왔고 65년에 제법 많이 입사했는데 이명박, 박재면, 전갑원, 그전에 그만뒀던 정희영, 그런 알짜배기들이 들어왔지. 그러니까 전체를 놓고 보면 회사의 사세 확장하고 공채 숫자하고 직결이 돼요. 무슨 얘기냐 하면 65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공사까지 뛰어들었다 그거죠. 그 당시 국내는 미8군 공사하고 공군 활주로 공사가 막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무렵에 정세영씨가 태국 방콕에 나가 있고 내가 사이공에 나가서 캄란만 준설공사를 비롯해 공사 물량을 살펴보고 응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세 확장이 급상승했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공채 숫자하고 회사의 성장 속도가 같이 올라갔다는 얘기를 하는 건데, 그렇게 하니까 인재들도 공채를 통해 많이 들어왔고 그중에 이명박 회장 같은 친구가 나온 겁니다(MB가 대통령 되기 전에 인터뷰한 것이어서 과거 직책을 그대로 옮긴다). 현대건설이 명예회장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기업의 최고 CEO를 공채로 들어온 사람을 앉혔다는 게 다른 기업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명예회장님이 그런 분이에요.”

-이명박 회장은 어째서 그렇게 진급이 빨랐죠? 60년, 61년에 들어온 선배들도 상당히 많았고 특히 권기태라는 분은 61년에 입사했고 명예회장님을 수행해 큰 프로젝트도 많이 한 걸로 나타나고 있던데….
“하하, 그거야 이명박 회장이 밀어냈나? 이 회장이 어떤 계기로 그렇게 빨리 진급했는지는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명예회장님한테 물어봐야지 뭐. 어느 땐 나도 깜짝 놀라서 명예회장님이 저 친구(이명박)한테 홀리셨나,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 하하. 이 회장이 사장 됐을 때 하도 빨라서 슬쩍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너(이춘림)하고 똑같은데 뭘 물어봐?’ 이러시고는 그만이야, 하하하. 그러고 권기태씨가 명예회장님 따라다니면서 큰 프로젝트를 많이 했다는 건 그 이후 얘기지.”

이명박 회장의 수직 진급은 이미 알려진 내용도 많지만 뒤에 직접 들은 육성으로 공개한다.

-65년부터 해외공사에 뛰어들었다고 하셨는데, 국내 건설업체로서는 최초로 태국에 진출한다 해서 그 당시 방송에서도 흥분을 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태국의 파타니에서 나라티왓까지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이지요?
“하하하, 무슨 출정식처럼 사진 찍고 방송국에서 중계까지 하면서 온통 소란했는데 그게 사실은 현대건설의 간판을 또 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굉장히 손해를 보고 위기에 봉착했던 공사예요. 고령교 귀신이 태국까지 따라온 거 아니냐고 그랬을 정도니까. 전부 사색이 되고 현대건설로서는 파산 직전까지 갔던 겁니다. 큰 손해를 봤고 명예회장님이 가장 고통스러워했지. 국내 최초다 어쩐다 해서 겉으로 볼 땐 첫 해외공사다 하니까 언론들도 요란하게 보도했지만 결과는 큰 손실을 봤어요. 결국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 뭐. 좌우간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나중에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 아주 좋은 경험이 됐지만 태국 얘기는 김영주 회장님하고 이명박 회장이 거기서 게릴라 습격도 받고 그랬기 때문에 잘 알 거야.”

“혁명주체가 공사판 용어 알아?”

▶금강산 첫 관광시찰단으로 여행길에 올랐던 이춘림 회장과 일행들(왼쪽부터 박병재 부회장, 이춘림 회장, 정세영 회장, 김수중 사장).

이 부분에서 이춘림 회장은 태국 진출이 당시로는 무모할 정도로 사전 정보가 없었고 의욕이 앞섰기 때문에 손실을 봤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현대건설 60년 역사에서 두 번째 위기를 불러왔었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태국 고속도로가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배경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때 왜 의욕이 앞섰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시련을 많이 겪었잖아요. 기업적으로만 시련이 많았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시련이 컸어요. 자유당이 넘어가고 민주당이 넘어가고 5·16이 되고, 그럴 때마다 사실 큰 회사들이 굉장히 심한 진통을 겪었거든. 세무조사를 당하고 말이지.”

세무조사를 당했다는 것은 정주영 회장도 가슴에 남은 앙금처럼 털어낸 적이 있었다. 5·16이 발생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경제인들을 마구 잡아넣고 있을 때였다.

당시 경제계를 대표한다면 박흥식, 이회림, 이원만, 이정림, 남궁연, 설경동, 조성철 회장 등으로 사실상 경제 주체들이었지만 그들을 과격 혁명주체 몇몇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아 헌병대로 연행하고 구속시킨 것이다.

그때 이병철 회장은 다행히 일본에 체류 중이어서 구속을 면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당시 기업인 등급으로 볼 때 건설업자에 불과해 연행될 정도는 아니었던 대신 정부 공사를 많이 수주했다는 이유로 권력형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라 세무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회고다.

“나를 털어봐야 나올 게 뭐 있어.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를 몽땅 차지했다고 그러는데 몽땅 차지하나마나 현대건설 말고 우리보다 적은 금액으로 하겠다고 나선 업자가 있기나 했어? 그러니까 오히려 정부 예산을 도와준 셈이고 엉터리로 덤비는 업자들을 막아 준 셈이에요. 그러고 우린 주로 미군 공사를 많이 했단 말이야. 근데 권력형이 무슨 말인지 권력형 축재자라고 그러니 말이지. 내가 미군에 권력을 부렸나? 권력형이라면 내가 권력을 부려서 정부가 됐건 미군이 됐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내 요구를 들어줬다는 얘기 아니에요.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때 박창암이라고 혁명주체 중에서도 헌병 계통인가 그랬던 사람인데 막 조지는 거야. 그래서 장부고 뭐고 다 보라고, 근데 뭐 공사판에서 쓰는 용어를 보면 알아, 군인이? 그것도 나만 알아보게 적어놨는데, 하하항. 그러니까 더 혼을 내는 거야. 사흘인가? 나흘인가 불려 다니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어찌나 화가 나는지 퇴계로에 최고회의 경제고문실이라고 있었어요. 무슨 약국 이층인데. 거기에 김용태라고, 공화당 때 국회의원 오래 하고 장관도 했지요. 그 양반이 박 의장 측근이고 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에요. 그 양반한테 막 퍼부어댔지. 보릿고개 해결한다고 혁명해 놓고 기업하는 사람을 이렇게 조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야. 아, 그 양반 빨라. 서울사대 출신인데, 금방 알아듣고 걱정 말라고, 박 의장한테 말씀 드려 부당한 처벌이 없도록 하겠다고, 열심히 하라고. 그래서 화가 좀 풀리고 나중에 보니까 김용태씨가 박창암씨하고 싸워 가면서 정말로 박 의장한테 주장을 펴서 구속됐던 경제인들을 전부 석방시켰어요. 근데 구속된 사람들만 다 석방하고 정작 화풀이하러 간 나한테는 부당한 처벌이 없도록 하겠다 해놓고 없기는 뭘, 세금 좀 내라고 그러잖아. 냈지 뭐, 하하항.”

이춘림 회장도 정 회장 성품으로 봐서 충분히 저항했을 거라면서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현대는 미군 공사를 주로 했기 때문에 소위 정치적인 바람은 덜 맞았다는 것이다.

“정인영 회장은 수주하는 데 앞장섰고 정주영 회장께서는 공사 시공하는 데만 대단한 집행력으로 추진하고 그러셨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정경 유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거죠. 그때 생각한 것이 현대가 더 성장하려면 해외로 나가지 않고는 길이 없다, 그래서 월남으로 나가고 태국 고속도로에 입찰을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지독하게 고생만 하고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것도 제일 큰 이유는 그때까지 우리가 국제 시방서대로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장비도 몰랐다, 그런 여러 원인이 있지만 기후 조건을 전혀 생각 안 한 겁니다. 장마가 한 번 오면 물이 빠지는 데 두세 달 걸려요. 그런 건 아무도 생각을 못했다 이거지요. 의욕이 앞선 거라. 예를 들어 한번은 정세영 회장이랑 싱가포르에 입찰이 있어서 가는데 보니까 바다가 쭈욱 있고 해변가 전체가 벌게요. 장마가 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됐는데도 벌겋다 이거죠. 아직도 계속 빠지고 있는 중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기후 조건들을 생전 나가보지 않았으니까 알 턱이 있나. 그만큼 사전조사가 허술했다는 건데, 그래서 해외 공사에서 초기엔 굉장히 고생했던 거예요.”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고생도 했고 손실도 많았다지만 현대건설로서는 새로운 공법을 터득하는 기회가 되고 국제적인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위기였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국제입찰에서 따냈다는 자체만으로도 흥분했다.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16개국 29개 업체와 경쟁해 수주했고, 더구나 공사금액이 65년 국내 공사 전체 계약액의 60%가 넘고 건설업체 전체가 해외에서 올린 공사금액의 34%(전체 1522만 달러)에 달할 만큼 큰 액수였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경사라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이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좌절감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김영주 명예회장은 기가 막혔다고 회고했다.

“한마디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요. 공사 현장이 보이는 게 아니라 고령교 때 흉기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업자들이 보여요. 그 정도로 태국 공사에서 손해를 봤다 이거지. 첫 해외공사인데 말이오.” <계속>

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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