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카레이스키 디아스포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개도국에 대한 무상 원조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활동을 취재하기 위해 몽골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에 왔다. 틈을 내 수도 타슈켄트 인근에 있는 ‘김병화 박물관’을 찾았다. 김병화는 소련 시절 탁월한 리더십으로 콜호스(협동농장)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현지인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타계한 1974년까지 34년간 타슈켄트 근교에 있는 3000ha 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며 매년 목화와 밀, 쌀 생산에서 혁신적 성과를 거둬 소련으로부터 ‘노력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았다. 소련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농장 이름을 ‘김병화 농장’으로 바꾸기도 했다.

스탈린의 지시로 1937년 9월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17만 명의 ‘카레이스키’(고려인)들 틈에 끼여 김병화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갈대가 무성한 타슈켄트 근교의 늪지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불모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농장장으로 있던 콜호스는 소련 전체에서 가장 잘나가는 농장이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문화 생활과 교육 수준에서도 월등히 앞섰다. 자녀들을 거의 모두 대학에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빛바랜 흑백사진들이 당시의 영화(榮華)를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17년이 지난 지금 김병화 농장의 신화는 희미한 옛이야기가 됐다. 우즈벡 정부가 협동농장을 해산하고 현지인에게 장기 임대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농장 이름에서 김병화는 사라졌다. 한때 3000명을 헤아리던 농장 내 고려인은 800여 명으로 줄었다. 그나마 노인이 대부분이다. 영락한 ‘김병화 농장’의 오늘에서 또다시 이주 위기에 몰린 카레이스키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소련 시절 고려인들은 120개 소수민족 중 가장 뛰어난 민족이었다. 전체 노력영웅 1200여 명 중 750여 명을 배출했고, 대학 졸업자와 박사 학위 취득자 비율에서 유대인 다음으로 높았다. 정부 고위직에도 상당수 진출했다. 고려인의 절반 가까이가 몰려 사는 우즈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91년 독립과 함께 사정은 달라졌다.

민족 정체성 확립에 나선 우즈벡 정부는 러시아어 대신 우즈벡어를 공용어로 채택했고, 공공기관에서는 우즈벡어를 쓰도록 했다. 우즈벡어를 할 줄 모르면 당연히 공무원이 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러시아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도 우즈벡어 구사 능력을 일종의 사회적 통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소련 시민이었던 시절, 고려인들은 우즈벡어를 쓸 필요도 배울 이유도 없었다. 러시아어만 하면 됐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졸지에 우즈벡 국민이 됐고, 우즈벡어를 못 하면 행세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소련 시민이란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우즈벡 민족주의에 의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많은 고려인들이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우즈벡어를 못 하면서 우즈벡 국민을 자처하기 어렵다. 방문취업제의 확대로 한국도 원하면 갈 수 있는 곳이 됐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을 자처하기도 어렵다. 점진적 시장경제 전환 정책을 택한 탓에 우즈벡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렇다 보니 고려인 젊은이들이 대거 우즈벡을 떠나고 있다. 너도나도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 또는 한국으로 떠나고 있고, 노인들만 남아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한때 24만 명에 달했던 우즈벡의 고려인은 최근 17만 명으로 줄었다. 앞으로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70년 전 강제 이주의 아픔을 겪었던 카레이스키들이 지금은 자발적인 이주를 택하면서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려인 2, 3, 4세대에게 우즈벡은 고향이다. 뿌리를 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땅이다. 처지를 한탄하며 떠날 곳을 찾기보다는 악착같이 우즈벡어를 배워 우즈벡 국민으로 당당하게 성공할 궁리를 해야 한다. 불모지도 옥토로 바꾼 그들 아닌가. <타슈켄트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