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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3.임정승인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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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승만(李承晩)박사에게는 멀리 앞을 내다보는 남다른 통찰력이있었다.아니 적어도 李박사 자신이 예언자적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졌다고 자부했다.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中日전쟁(1937)이 터지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1939)하자 李박사는 미국과 일본간의 충돌이 임박했다고 느끼고 1939년 3월말- 마치 지진 발생을 예감한 곤충류가 진원지(震源地)에서 달아나듯- 하와이를 떠나 미국 수도 워싱턴 D.C.로 향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부처는 워싱턴 국립동물원 근처 호바트街의 작은 2층 가옥에 입주했다.여기서 그는 밤마다 울리는 동물들의 처절한 포효(咆哮)를 들으며 회심의 대작(大作)『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저술에 몰 두했다.이 책에서 이승만은 아시아를 석권한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제패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불원간 미국에 도전할 것을 예고하고 미국이 당장 힘으로써 일본을 제재하지 않을 경우 美日간 대전쟁이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1941년초 이 책이 뉴욕의 유명한 출판사(프래밍 H 레벨社)를 통해 간행됨으로써 이승만은 일약 미국지성계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드디어 1941년 12월8일 진주만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이 예고했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고 그는 워싱턴 일각에서 예언자라는 평을받기도 했다.
『일본 내막기』를 탈고한 후 이승만은 미국정부로부터 중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이를 위해 그는 오랫동안 문닫았던 워싱턴의 한국위원부(Korean Commission:일명 駐美外交委員部) 사무실을 다시 열었다.그리고 1941년 4월에 새로 발족된 재미(在美)한족연합위원회와 접촉해 이 단체의 외교위원장직을 맡음과 동시에 김구(金九)주석이 이끄는 임정으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직을 임명받았다.즉 그는 임정과 재미교포단체 를 대표하는 외교위원장자격으로 워싱턴 정부 요로에 접근했다.
이승만이 노린 외교목표는 미국등 연합국으로부터 임정의 승인을획득함으로써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對日)전쟁에 적극 참가하며 나아가 전후(戰後)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이승만은 이러한 소망을 담은 임정 문서를 진주만 사건 발발전에 美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전달했다.진주만 사건 직후 그는 국무부를 방문해 국무부 극동국장 혼벡박사등 요인을 만나 임정 승인을 촉구했다.그들의 반응이 냉담하자 이승만은 헐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띄워 임정 승인을 요청했다.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도 만나 측면지원을부탁했다.
루스벨트대통령이 퀘벡에서 영국수상 처칠과 회담할 때(1943.8.23)와 트루먼 대통령이 포츠담에서 연합국 원수들과 회담할 때(1945.7.21) 이들 대통령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조를 정도로 그는 극성을 부렸다 .
이승만은 임정 승인 획득 캠페인의 일환으로 1942년초 한국독립에 깊은 관심을 가진 미국의 저명인사들-예컨대 駐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크롬웰,워싱턴의 변호사 스태거스,INS통신사 기자윌리엄스,시러큐스대학 교수 올리버박사등-을 포 섭,규합해 韓美협의회(Korean-American Council.회장 크롬웰)라는 후원단체를 조직하고 이 단체의 명의로 美정부에 압력을 가했다.韓美협의회는 1942년초 3.1절을 앞두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공동으로 백악관 근처 라파 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다.2백여명의 韓美 인사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美 하원의원 커피등은 임정의 즉각 승인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으며 회의 진행상황이 워싱턴의 WINX 방 송망을 통해 실황중계됨으로써 상당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끝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한국문제를 소련.중국 등 관계열강과 협의해 처리하려고 작정한 美정부는 임정승인 요구에 처음부터 거부반응을 보였다.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민당측에서 임정승인 움 직임을 보이자 이에도 제동을 걸었다.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임정승인 획득노력은 목표달성에 실패한 셈이다.그러나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완전히무위(無爲)로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장기간에 걸친 그의 끈질긴 외교와 홍보 노력은 1943년 11월 카이로에 모인 美.
英.中 원수들로 하여금 「적당한 시기에」한국을 독립시켜 준다는「카이로 선언」을 채택하는데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기때문이다.
태평양전쟁중에 이승만은 이 외에도 몇가지 돋보이는 일을 추진했다.그는 美 육군전략처(OSS)와 협력해 한국인 청년 20여명을 OSS특공대의 요원으로 선발해 특수훈련을 받게한 다음 그들을 대일전쟁에 참여시켰다.
그는 美 법무장관과 육군장관을 설득해 전쟁중 美정부가 한국교포들을 일본인과 구별해 「우호적 외국인」으로 취급하도록 조처했다.이승만은 미국 체신부로 하여금 1944년 11월 태극기 마크가 그려진 우표를 발행케 했다.그리고 그는 19 42년 6월몇주간에 걸쳐 「미국의 소리」(VOA)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에게 일본의 패망을 예고하는 육성(肉聲)방송을 함으로써 일제하에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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