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이긴 사람들 ① 고려대 박지홍 씨

중앙일보

입력

지난 14일 고려대. 박지홍(20)씨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뇌병변 3급 2호. 장애를 딛고 올해 고려대 경영학부에 합격한 그의 인생스토리를 듣기 위해서다. 오전 10시 30분 교양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1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인터뷰를 꺼려서 일부러 나오지 않는 걸까, 걱정스런 마음에 전화를 했다.


   “아~녕하세요. 어디세요?” 어눌한 목소리의 박지홍씨는 오히려 내게 위치를 물었다. 난 교양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 했다.
   “아, 그렇죠.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학생회관 앞에서 만나기로 한 줄 알았어요. 빨리 가~께요.”
   160cm 조금 넘을까, 작은 키의 지홍씨는 다리를 절었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축 늘인채 힘겹게 걷는 모습. 한눈에 지홍씨임을 알 수 있었다.
   “기자님, 감사해요.” 뜬금없이 ‘감사’란다. “제 얘기 잘 알아들으셔서요. 사람들, 잘 못 알아듣거든요.” 뒤늦게 손을 잡았다. 참 따뜻했다. 자신의 얘기를 하나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였대요. 아버지가 이유는 말씀을 안 해주셔서 몰라요.”
   어릴 때부터 놀림에 익숙하다는 지홍씨. 달리기는 항상 꼴찌였다.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해도 그들에게 비친 지홍씨는 ‘신기하게 생긴 무엇’에 불과했다.
   “특수학교에나 가지 왜 일반학교에 왔냐”고 놀림받기 일쑤였다. ‘왜 나를 낳았을까’ 부모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다.
   “중학교에 갔는데 특수반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무조건 일반반에 있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일반반 친구들은 여전히 지홍씨를 외계인 취급했다. 당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공부 잘 하면 무시 안 당하지 않을까’ 지홍씨는 책을 잡았다.
   IQ를 기억하지 못한다. 부모님 이름은 알지만 나이는 모른다. 남들 10분이면 외울 것을 30분, 1시간씩 외워야 비로소 기억에 남는다. 그 탓에 친구들에 비해 3~4배는 공부해야 그럭저럭 쫓아갈 수 있었다.
   5남매 중 넷째. 경북 영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부모는 누나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지홍씨를 학원에 보낼 여력이 없었다.
   “학원에 가면 기출문제도 뽑아주고, 수학공식 외우는 방법도 알려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뭐… 문제집에 나온 해설부분이 유일한 과외교사였죠.”
   문제집을 풀고 해설부분을 보면서 암기하는 게 ‘지홍표 공부’의 전부였다. 하루 5~6시간씩은 반드시 공부했다.
   “처음에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근데 어쩌겠어요, 선천적으로 머리가 안 좋은데…. 남들보다 덜 자고 공부하는 수 밖에요.”
   끈기는 열매를 맺었다. 250명 중 4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3년 장학금을 받고 영주 대영고에 진학했다. 순식간에 친구들의 놀림이 사라졌다. 그러나 병원을 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날이면 또다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그냥 신기한가 봐요. 길을 가다 멈춰서서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싫었어요.” 오기가 생겼다.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잡았다.
   기숙형 고교인 덕에 야간자율학습과 특강수업 등으로 하루를 빠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잘 하려면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자정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간 지홍씨는 혼자 랜턴을 켜고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친구들이 “잠 좀 자자!”고 하면 “난 너희같이 기억력이 좋지 않아 안 하면 안 돼”라고 맞받아쳤다. 『수학의 정석』을 10번 넘게 봤다.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언어와 영어는 한 달에 한 권씩 문제집을 풀었다. 결국 지난해 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 서울시립대에서 장애우 특별전형으로 갈 수 있는 학과가 거기밖에 없었다.
   “워렌 버핏 같은 경제분석가가 되고 싶다”는 지홍씨. 1학기를 마친 7월 반수를 결심했다. 노량진 단과학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수업을 찾아 들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원점수 50점 이상을 끌어올렸다. 결국 고려대 합격 통보를 받았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 “평범하게 사는 거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뼈가 느껴졌다.
   “제가 수화수업을 듣고 있거든요. 교수님이 말씀하셨는데, 한국에 사는 장애인수는 400만명 정도 된대요. 장애인이 그렇게 많은 데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숨어살기 때문이죠. 저도 장애인이지만 한국이란 나라가 장애인 살기에는 참 힘든 나라에요.”
경제전문가가 되고 싶은 것도 일반인들의 편견을 깨고 싶어서다. “경제전문가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되는데 장애인을 누가 만나줄까요? 그런 편견을 깨는 게 제 소망이에요. 세상과 장애인의 가교가 되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요?”
   20세 청년의 속깊은 생각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날 밤 지홍씨로부터 한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발음도 안 좋은데, 인터뷰 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고맙습니다^^*’ 답장을 보냈다. ‘지홍씨처럼 훌륭한 사람을 인터뷰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프리미엄 최석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