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을 줄이다니…” VS“제조업이 기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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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34면

“이건 멍청한 짓이다!”
‘세기의 경영자’ 잭 웰치(72)가 지난주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친정 제너럴일렉트릭(GE)을 향해서다. 정확히 말해 그가 후계자로 삼은 제프리 이멜트 GE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공격이었다. 웰치는 16일 이멜트가 올 한 해 두 자릿수 실적 증가를 공언한 직후 6%나 줄어든 1분기 순이익을 내놓은 것을 비판했다. CEO의 신뢰성까지 거론했다. GE의 ‘실적 쇼크’가 ‘전·현직 CEO의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GE의 전·현직 CEO 웰치와 이멜트의 충돌

발언의 파장이 커지자 웰치는 17일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GE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에 동의한다”며 “더 이상 참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급기야 사태는 이멜트의 경영전략에 대한 논란으로 비화하고 있다.

의도적인 비판
‘사자처럼 용맹하고 여우처럼 교활한’ 인물로 알려진 잭 웰치가 자신의 후계자를 공개 비판한 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풀이하는 시각이 많다.'잭 웰치 리더십'을 쓴 로버트 슬레이터는 “웰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GE가 자신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다”며 “하지만 GE는 그가 떠난 직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인공이 바로 이멜트였다”고 말했다.

이멜트는 9·11 테러 나흘 전인 2001년 9월 7일 GE 회장 자리에 올랐다. 제임스 맥너니(보잉 회장)와 로버트 나델리(홈 디포 전 회장)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뒤였다. 경쟁을 이겨낸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그의 행보는 활기찼다. 이멜트는 9·11 테러 이후 미국 경제의 위기상황을 잘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연평균 매출 8%, 순이익 10% 증가 목표를 달성해 나갔다.

이멜트는 뒤이어 전임자인 웰치의 경영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금융 부문을 줄이고 생명공학·보안기술 등 자기 스타일의 업종을 강화해 나갔다. “우리는 그동안 머니게임(금융)에 너무 치중했다”고 간접적으로 웰치의 전략을 비판하기도 했다.
웰치는 자기의 ‘분신’이라 할 GE가 이멜트 체제 아래서 빠르게 변해 나가자 박탈감과 서운함을 강하게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초 한 경영대학원(MBA) 특강에서 “그(이멜트)가 가는 길의 끝이 어딘지 궁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 1분기 실적 악화에서 ‘그 길의 끝’을 본 것일까. 그는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성장모델의 충돌
웰치의 발언은 벌써 효과를 낳고 있다. GE 주식을 보유한 펀드매니저 중 일부가 이멜트식 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웰치식 경영의 복원을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이멜트는 “(내 전략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방어전선을 폈다. 그는 인수합병(M&A)보다 사내 성장동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이를 위해 이멜트는 해고보다 직원을 재교육해 인적자원의 질을 높이는 쪽을 선택했다. 이른바 ‘유기적 성장전략’이다. 또 웰치가 주력 부문으로 삼은 금융을 줄이고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금융 부문의 순이익 비중은 50%에서 40% 수준으로 줄었다.

이에 비해 웰치는 부진한 부문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잘라냈다. 1980년대 10년 동안 41만 명이던 GE의 직원 수를 21만 명 수준으로 20만 명이나 줄였다. 오죽했으면 그의 별명이 사람만을 골라 죽이는 ‘중성자탄’이었을까. 이렇게 몸집을 줄인 웰치는 금융회사를 대거 사들여 제조업제 GE를 사실상 금융회사로 바꿔놓았다.
전문가들은 “웰치가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최전성기인 1990년대를 대표하는 경영자였다면 이멜트는 엔론 사태를 계기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시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CEO”라고 평가했다.

경영전략 차이만큼이나 두 사람의 출신 배경도 대조적이다. 이멜트는 공장 근로자가 많은 오하이오주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도 GE 기능공이었다. 이런 이유인지 이멜트는 “미국이 금융에 너무 집중해 일자리는 줄고 빈부격차가 심해졌다”고 말하곤 했다.
반면 웰치는 미국 최초의 투자은행가 조지 피바디 등 금융인을 많이 배출한 매사추세츠주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0년 GE에 입사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금융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해 제조업에 익숙한 당시 간부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멜트의 대응은
이멜트는 중국과 인도 등 신흥시장을 내세우며 에너지와 항공장비, 환경 부문 등이 GE의 성장엔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주주들을 설득하고 있다. 대신 신용카드 사업을 정리하는 등 금융업 축소를 계속 밀어붙일 태세다. 그는 “올 1분기 실적이 악화된 것은 금융부문 손실이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이라며 “문제의 원인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부문을 줄여 마련한 돈을 자신이 주력 부문으로 정한 첨단 기술부문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금융부문은 단기적으로 순이익을 좋게 하는 데 요긴하다. 다른 부문이 부진하면 금융부문의 주식과 채권 등을 팔아 메울 수도 있다. 또 제품을 팔면서 금융부문을 활용해 할부 서비스 등을 제공할 수도 있다. 이멜트의 금융부문 축소로 이런 이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흥시장과 함께 GE의 중요한 텃밭인 미국과 유럽 경제의 활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올 2분기(4~6월) 실적마저 시원치 않으면 더한 공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퇴진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선임자가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시장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워런 배니스 미국 서던캘피포니아대학(경영학) 교수는 “이멜트는 GE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여러 방향에서 벌였다”며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멜트에겐 다행스럽게도 요즘 미국 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금융보다는 제조업 쪽이 상대적으로 낫다. 더욱이 일반 소비자보다 기업 고객을 상대로 한 GE의 고부가가치 제품이 더 잘 팔리고 있다. 일단 이멜트의 선택이 시대 상황과 부합하는 셈이다. 그가 이번 고비를 극복한다면 GE는 ‘잭 웰치의 20년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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