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2부 불타는 땅 운명의 발소리(23) 이래서 술들을 마시나보군.취해서 떠들어대는 길남에게 이따금 고개를 돌리면서 지상은천천히 걸었다.별로 마셔 본 적이 없는 술이어선가.자꾸만 땅이흔들리며 기우뚱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이래서 사람들은 취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뭔가 가슴에 있던 것들이 싸악 쓸려나간 것 같으니 말야.그는 어둠 속으로 미치코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가슴 속에 마치 벌레라도 우글우글 살고 있는 것 같던 지난 며칠 동안의 혼란스러 움은 사라지고 없었다.다가오는 게 있으면 맞서야겠지.올테면 오라지.그게 무엇이든 나는 피하지 않을 거다.
옆에서 길남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배운 것도 없는 놈이다.왜 이런 말이 있지.화분에 심어놓으면 들풀도 다 화초라고 한다는 말 말이다.내가 그 꼴이다.
』 『빨아 다린 체 말고 진솔같이 있거라.너 그런 말 못 들어봤어.누가 너보고 뭐라 하지 않는다.다 잘 한다고들 하던데 엄살 쓰지 말아.』 『빌어먹는 놈이 콩밥 마다할까.내 꼴이 그 꼴이지.』 멀리 다리가 보이고 몇 개의 불빛들이 반딧불 처럼 작게 떠 있었다.문닫은 이층 상점들 앞에 길남이 쭈그리고 앉으며 중얼거렸다.
『난 사람을 죽인 놈이다.』 지상이 길남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내가 말이다.좋아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를 내가 죽였단 말이다.너 첫정이라는 게 뭔지 아냐.결혼을 했다니까 넌 나하고는 다르지만,그러나 너도 알 거다.사람을 죽인 마음이 뭔지…그건 모르겠지만 말이다.죽었단다.그 여자가 죽었 대.내가 섬을 빠져 나온 후 말이다.』 자기가 죽였다고 했다가 또 그 여자가 죽었다고 하는 길남의 말을 지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었단다,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대.』 이 친구가 지금 우는건가.지상이 고개를 숙이며 길남의 어깨를 집었다.
『섬에 여자가 있었다는 말이냐.넌 거기서 탄광에 있었다고 했잖아….』 『기다리라고 했었다.기다리라고 한 여자가 죽었다는 말이다.』 『무슨 여잔데? 같이 살던 여자냐.』 길남이 벌떡 일어섰다.
『유곽에 있던 여자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