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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옻칠 공예의 땅 일본에 새긴 한국 장인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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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용복 소장이 그의 칠예연구소에서 기초 옻칠한 판넬에 입김으로 금가루를 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일본 메구로 가조엔에 있는 세계 최초의 옻칠 엘리베이터.

일본의 영어이름 '재팬'(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 '옻칠'을 뜻한다. 일본이 일찌감치 서양으로 옻칠 공예품을 많이 수출해 'japan'이 국가이름으로 굳어졌다. 이처럼 옻칠공예의 대명사인 일본에서 세계 최대의 옻칠 공예품 미술관을 개관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있다. 일본 동북쪽 지역인 이와테(岩手)현에서 17년째 활동 중인 옻칠 예술가 전용복(全龍福.52.전용복 칠예연구소 소장)씨다. 이달초 그를 만나기 위해 이와테현의 모리오카(盛岡)시를 찾았다.

오는 5월 개관을 목표로 준비 작업이 한창인 미술관은 원래는 하시모토란 미술가가 1975년 지하 1층.지상 2층에 연면적 3000여㎡ 규모로 설립, 시에 기증한 것이란다. 모리오카의 대표적인 문화 장소였지만 하시모토 사망(79년) 후 전시 작품 부족 등으로 3년 전 폐관됐다. 그러다 全소장의 제자 30여명이 주축인 칠문화연구회 '재팬 21 이와테'가 지난달 초 20년간 무상 임대받아 '이와야마(岩山) 칠예미술관'으로 새로 개관하는 것이다. 시 재산을 개인이 임대할 수 없어 단체 이름을 빌렸지만 '재팬 21 이와테' 회장인 全소장이 모든 운영을 맡는다.

全소장은 "칠공예 등 1000점을 전시하고, 한국전통문화 전시실.옻칠 교육장.문하생 작업실.개인 연구소 등도 들어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 50~100점을 전시한 옻칠 미술관은 있지만 1천점 규모는 세계 최대"라며 "개관 비용(1억~2억엔)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 재산을 모두 털어넣었고 나머지는 기부금 등으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자들과 모리오카시 전직 정무부시장 등 지역유지들도 "모리오카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라면서 발벗고 나섰다.

全소장은 "꿈만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라마같은 삶을 개척한 끝에 맺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부산 출신인 全소장의 부모는 아이러니컬하게 일제의 피해자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징용갔다가 결혼하고는 해방 후 빈손으로 귀국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형이 병사한 뒤 온갖 장사를 해 병약한 부모님과 동생들의 생활을 맡았다"고 말했다. 야간고교 졸업.해병대 제대 후 목재회사에 취직, 고속승진했지만 곧 그만두고 경기도 마석.부산 등에서 공예사를 운영했다. "어릴 때부터 창작미술을 좋아했다"는 그는 "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근(金鍾根)부산미술관 초대관장이 그의 외삼촌이다.

80년대 초반 토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瓦胎漆)'과 만나면서 옻칠 공예에 눈을 떴다. "자연 수액인 옻의 신비와 황홀함에서 새로운 세계를 봤다"고 기억했다. 독학하던 그는 한 일본인이 "메구로 가조엔(目黑雅敍園)의 것"이라며 부산으로 들고온 '작은 한국식 나전칠기 밥상'으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메구로'는 도쿄의 지역 이름,'가조엔'은 한국에서 흔한 중국음식점 이름인 '아서원'의 일본식 발음이다. 그러나 메구로 가조엔은 31년 일본인이 설립한 연건평 8000여평 규모의 호텔.연회장.결혼식장 복합 건물이었다. 특히 난푸(南風)등 당시 유명 예술가들이 직접 벽.천장 등에 예술작품을 제작하고, 화장실에도 나전옻칠작품을 장식해 '건물 자체가 국보급 예술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도쿄시의 도시계획으로 철거운명에 놓이자 설립자 후손들이 인근에 복원키로 했다. 1000억엔(약 1조원) 규모의 대공사였다.

86년 한국현대공예미술전에서 와태칠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全소장은 복원공사에 공모키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예술세계를 펼치고, 무명의 조선 장인들이 만든 메구로 가조엔 나전칠기들을 직접 복원해 선조들의 혼을 되살리고 싶어서였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자 부산의 전문대 일문과(야간)에 진학해 일본어 공부도 시작하는 등 착실히 준비했다. 돈이 없어 열차를 무임승차하고 공원에서 자면서도 3~4개월마다 방일해 옻칠 전문가들을 찾아다녔고 메구로 가조엔 작품들을 분석하는 한편 자신의 솜씨를 알리기 위해 도쿄(東京)의 한국문화원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88년 쟁쟁한 일본 기업.전문가들을 물리치고 메구로 가조엔 예술 작품의 10%인 옻칠작품 복원 담당자로 결정됐다. 오카야마시 부근 마을 가와이무라(川井村)가 작품 복원공사 장소로 정해져 이와테현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복원공사는 3년 동안 한국내 연간 옻생산량(약 500㎏)의 20배인 10만t을 쓰고, 연인원 10만명이 동원됐다. 그는 실력.노력.창의성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메구로 가조엔 측이 목판화.일본화 등 전체 예술 작품의 복원공사를 의뢰하는 개가를 올렸다. 복원비용만 총 34억엔이었다. 그는 "크고 작은 작품 5000여점 중 70% 정도가 나의 작품"이라고 밝혔다. 세계 최대(넓이 23.6m.폭 1.4m) 옻칠 작품인 '사계산수화', 엘리베이터 34대를 장식한 세계 최초의 금속옻칠도 그의 작품이다.

모르는 기술이 있으면 전문가들을 찾거나 혼자 연구했다. 옻칠 위에 입김으로 금.은가루를 뿌려 색을 넣는 '구치부키 마키에'(口吹蒔繪) 등 새 기법도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그는 "일본 옻칠의 특징은 금가루 등을 넣은 대나무 통을 손끝으로 톡톡 쳐 금을 뿌리는 '마키에'기법인데 강약조절이 안 돼 계속 실패했다. 어느날 화가 나 소리를 빽 질렀는데 입김으로 금가루가 날라가 고르게 채색된 것이 계기였다"고 말했다.

메구로 가조엔은 장기 불황 등으로 2002년 미국계 투자회사(론 스타)에 매각됐지만 그대로 영업 중이다.

全소장은 모리오카에 살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복원공사한 가와이무라에서 94년 개관한 '약사도칠(塗漆)공예관'의 명예관장을 맡아 1300여명에게 옻칠을 가르쳤고, 대학 등에서 230여회 강연하는 등 지역문화 발전에 애썼다. 부산에도 연구소를 열고, 전시회도 개최했다. 한.일 초등학생 교류 등 '민간 외교'에도 열심이다. 이 덕분에 94년 일본방송협회(NHK)의 일본 문화 발전 기여 공로상, 2000년 한국정부의 '신지식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全소장은 휘발유 등을 넣지 않은 옻의 원액만을 사용한다. "옻의 특성.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일본의 다양한 옻칠기법을 활용한 창조적인 기법으로 현대화하면서 옻칠의 예술세계를 계속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연구소에는 장롱 등 일상용품 이외에 하회탈, 스님의 안무춤, 고구려 벽화 등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순수 작품들도 많았다. 그는 새로운 세계 최대 규모(가로 18m.폭 2.42m) 작품도 준비 중이다. 全소장은 "'기다림'을 주제로 고향의 정서를 표현하는 한편 감동.생명감을 담은 비구상 작품을 많이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全소장은 옻칠의 실용화.산업화에도 관심이 많다. 자신의 휴대전화에 옻칠을 한 그는 "옻칠은 5000년 이상 보전되는데다 시멘트 건물.컴퓨터 등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전자파를 차단하고 습도 조절 기능이 있어 건강산업 등 산업용으로 크게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동반자는 부인 정하영(鄭河英.50)씨다.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온 鄭씨는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 근무하다 26년 전 만났다"며 "일본에서 공업시험장 등을 찾아다니며 옻.디자인 자료 등을 조사하는 등 예술의 동반자"라고 자랑했다. 그는 "명문사립여대 출신인데 결혼 후 고생만 했다. 집사람이 한국을 방문하면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작품에 담는다"는 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세자녀 중 두 딸은 외국 유학 후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중3인 아들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미술을 알고 옻칠에 인생을 걸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가르쳐줄 생각"이라며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비록 일본에서 활동 중이지만 뜨거운 조국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리오카=글.사진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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