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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아이들이 스스로 나는 것 … 그게 제 바람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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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말만 한 놈이 선생님 등에 업혀 좋다고 활개를 친다. 무거울 텐데 선생님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래 우리 형진이 갈매기처럼 훨훨 날아라.” 선생님이 등에 업은 건 희망이다.

뿌앙~. 오전 7시, 목포항을 떠나 안좌도로 가는 대흥페리호의 고동소리가 우렁찹니다. 널찍한 온돌 객실에 들어선 김은숙(38) 선생님이 가방에서 담요를 꺼냅니다. “오늘은 파도가 꽤 셀 것 같네요. 이런 날은 누워서 가야 뱃멀미를 안 하거든요.”

김 선생님은 전남 신안교육청 소속 특수학급 순회교사입니다. 섬에 사는 장애학생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가르치는 ‘이동 선생님’이지요. 이번 학기 선생님의 제자는 다섯 명입니다. 목포에서 뱃길로 한두 시간씩 떨어진 섬에 사는 아이들입니다. 뭍사람들에게 신안의 바다는 아름답기로 소문났지만 장애아들에게 바다는 세상과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입니다. 쾌속선이 뜨고 다리가 놓여도, 몸과 마음이 불편한 아이들은 섬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김 선생님이 아이들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오늘은 목요일, 선생님이 가는 곳은 목포에서 배로 1시간 거리의 안좌중학교입니다.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서치훈군과 박형진군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목포 앞바다, 거센 바람에 배가 출렁입니다.

<신안>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열셋까지 밖에 못 세던 아이가 이제 스물까지 단숨에 셉니다
가르치는 대로 쏙쏙 받아들이는 아이들
수업이 일주일에 한 번뿐이라 안타깝습니다

치훈이는 카메라만 보면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꼭 한마디 덧붙인다. “사랑해요.”

매일 다른 섬으로 출근하는 선생님

김은숙 선생님의 일주일은 빡빡하다. 월요일 신안교육청으로 출근해 일주일간의 수업 일정을 챙기고 화요일엔 오전 6시40분 배를 타고 장산도에 간다. 수요일엔 비금도, 목요일엔 안좌도, 금요일엔 암태도, 매일 다른 출근길이다. 가까운 섬은 1시간, 먼 섬은 2시간30분이 걸린다.

선생님이 담당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지적 장애나 학습 장애를 가지고 있다. 중학교 1학년이 4명, 3학년이 1명이다. 일부는 섬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일부는 학교도 가지 못해 집에 있다. 장애 학생 수에 비해 특수교사가 모자라는 탓에 신안군에서는 장애 학생이 3명 이상 돼야 특수학급을 만들 수 있다. 장애 학생이 한둘 있는 학교는 특수학급을 둘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이 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일반 학교, 일반 학급에 들어가 ‘의미 없는 수업’을 받아야 한다.

김 선생님은 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치료 등을 배웠다. YMCA 같은 사회단체에서 심리치료를 강의하다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싶어” 늦은 나이에 대학교 특수교육과에 편입했다. 2007년 1학기부터 신안군 특수학급 순회교사로 발령받아 섬을 오고가기 시작했다. 목포시내에 있는 집에서 목포항까지 차로 15분, 배를 타고 1시간에서 2시간30분, 배에서 내려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가야 하는 험한 출퇴근길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오전에 가장 집중력이 좋기 때문에 그 시간을 놓치면 공부하기가 힘들다”며 매일 아침 첫 배를 탄다. 출근하는 선생님의 양 손에 보자기로 싼 짐 몇 개가 무겁게 들려 있다. 수업에 필요한 도구인 인형과 바둑돌, 숫자판, 장난감 시계 등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

배가 안좌 읍동항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10여 분을 달리니 안좌중학교 표지판이 나타난다. 1952년에 문을 연 오랜 학교지만, 이제는 전교생이 49명뿐이다. 그래도 인근 섬에 있는 학교 가운데서는 꽤 큰 규모란다. 봄꽃이 흐드러진 교문을 들어서니 저만치에서 벌써 형진이가 손을 흔들며 뛰어 나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눌한 말투에 발음도 정확하지 않지만 목소리에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하다. 3학년인 형진이는 멀쩡해 보이지만 지적 장애 1급이다.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할 수 없어 아직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한다.

“형진이는 장애도 있지만 ‘문화적 지체’가 더 심각해요. 주변 환경 때문에 학교공부를 일찍 시작하지 못했고, 가정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비슷한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들보다 발달 속도가 훨씬 느리지요.” 형진이의 엄마·아빠도 지적 장애 2급 장애인이다. 형진이가 학교를 혼자 오고갈 정도로 눈치가 빠른데도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다.

초등학교 때 잠깐 선생님이 있었지만 형진이는 말과 글을 배우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는 형진이를 가르치러 오는 특수교육 담당 선생님이 없었다. 신안군에 순회교사가 부족해 형진이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돌봐줄 사람이 없는 형진이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학교를 휘젓고 다녔다. 꼬질꼬질한 얼굴로 공부시간에는 구석자리에서 내내 잠만 잤다. 그러던 형진이가 올 들어 신이 났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입학한 치훈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시는 김은숙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이 오지 않는 날에는 특수교육 보조교사인 정경미 선생님이 두 아이들을 돌봐준다. 교복을 빨아주고, 체육복을 입혀 주는 선생님들 덕에 형진이는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기 직전, 치훈이가 택시를 타고 학교에 왔다. 치훈이네 동네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매일 택시로 학교를 오가야 한다. 택시비는 교육청에서 절반, 학교에서 절반을 댄다. 함께 온 할머니가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라”며 치훈이 등을 두드려 주고 갔다. 치훈이는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어릴 적 엄마가 어디론가 떠나고, 아빠는 목포로 돈을 벌러 나갔다. 김은숙 선생님이 찾아오는 목요일이면 치훈이 할머님은 만사 제쳐두고 학교에 와 “정말 감사하다”며 선생님의 손을 꼭 잡는다.

1, 2 교시와 3, 4 교시

1, 2 교시는 치훈이 시간이다. 선생님과 치훈이가 모래놀이를 한다. 한쪽에는 커다란 모래판이 놓여 있고 , 다른 쪽에는 집·교회·소방차·군인·울트라 맨·공룡·코끼리·아이스크림·과자 등 100가지가 넘는 모형이 놓여 있다. 모형을 갖고 놀면서 사물들의 이름을 익히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치훈이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안좌초등학교에서 김은숙 선생님에게서 1년간 배웠다. 그래서인지 모형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맘에 드는 모형을 모래판에 늘어놓아 보세요” 하니 인형들을 꼼꼼하게 챙겨 바구니에 담는다.

오늘 치훈의 모래판 위에서는 파티가 벌어졌다. 모래를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성당과 나무와 돌을 모래언덕에 얹고, 바다에는 공주님과 물고기 모형을 늘어놓는다. 모래판 한 구석에는 신문지 조각을 깔더니 햄버거·수박·과자 등을 모은 후 “생일이에요” 한다. “이 공주는 무얼 하고 있나요?” 선생님이 물었다. “공주님은 헤엄쳐요. 물고기도 헤엄쳐요. 공주님을 사랑해요. 공주님이 울었어요”라고 치훈이가 말한다. “학교나 집에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라는 선생님의 설명이다. 지난해에 이 놀이를 처음 시작했을 때 치훈이는 모형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어지럽게 늘어놓을 뿐이었다. 서너 달이 지나자 차츰 주제별로 모형을 고르기 시작하더니, 이젠 이야기를 만들고 제법 설명도 한다. 모래판에서 놀던 치훈이가 갑자기 흥얼거린다. “어머나, 어머나, 이~지 마세요~.” 할머니에게 배운 치훈이의 18번 노래 ‘어머나’다.

3, 4교시는 형진이 시간이다. 형진이가 동백꽃 두 송이를 흔들며 교실에 들어서더니 선생님께 내민다. “와, 예쁘다. 형진이 선생님 좋아?” 하고 물으니 “좋아요” 하며 헤헤 웃는다. 2년간 혼자 놀던 형진이는 아직 모래놀이에 익숙하지 않다. 모래판 위에 포클레인을 얹어놓고 “붕붕” “끼익 끼익”하며 왔다갔다하는 게 전부다. 기차 모형을 유심히 바라보는 형진이에게 “기차 타 봤어?”라고 물으니 “타 봤어” 한다. “언제?” 하니까 “아빠, 목포, 탔어” 한다. 형진이와 하는 수업은 쉽지 않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형진이는 공부하다가도 교실 밖으로 훌쩍 사라지기 일쑤다. “형진이 어디 가?”라며 선생님도 따라 나선다.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형진이를 등에 업는 선생님. 형진이가 좋다며 두 팔을 활짝 펼치고 팔짝팔짝 뛴다.

아이들은 자란다

정신연령이 네댓 살 정도인 아이들이지만,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다. “그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인지 가르치는 내용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요.” 조금씩이나마 아이들이 나아지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힘이 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열셋까지밖에 세지 못했던 치훈이는 이제 스물까지 단숨에 센다. “하나, 둘, 셋, 넷…스물.” 바둑돌을 돼지저금통에 집어 넣으며 “스물”이라고 또렷하게 발음하는 치훈이를 보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하다. 형진이는 아직 “하나, 둘, 셋, 으으…, 다섯!” 한다. 여러 번 “넷”을 가르쳐줬지만 자꾸 까먹는다.

형진이의 단짝 친구들.

선생님은 올해 조금 ‘무리한’ 수업 목표를 세웠다. 치훈이가 한 단위 수의 덧셈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형진이는 숫자를 열까지 세고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매일 수업을 할 수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는 거기까지 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매일 공부하는 거랑, 일주일에 한 번 공부하는 거랑 차이가 무척 크거든요. 장애 학생이 있다면 특수학급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셈도, 한글도 늦되지만 아이들에겐 나름의 재능이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치훈이는 요즘 사물놀이에 빠져 징·꽹과리·장구를 두드리는 재미로 산다. 친구들과 사이가 좋은 형진이는 ‘명랑소년’이다. 사람들을 수시로 웃긴다.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에 오지 못하는 날을 빼면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나와 등교하는 친구들, 출근하는 선생님들을 반긴다. 정봉면 교장선생님은 “등교시간은 형진이가 우리 학교 1등”이라며 “웃음이 아주 해맑고 고운 아이”라고 칭찬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이다. ‘특수교육진흥법’은 중학교 과정 이상의 학교는 특수교육대상자의 특성에 따른 진로 및 직업교육을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업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직업교육이란 먼 나라 이야기다. 치훈이도, 형진이도 조금 더 배우면 간단한 공장 일 정도는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섬에는 일자리가 없다. “학교를 나서면 사회가 이 아이들을 보듬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네요.” 선생님이 퇴근하는 길, 형진이와 치훈이가 학교 문 앞까지 따라 나온다. 헤어지는 게 서운한 치훈이는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럼, 선생님 일주일 있다가 또 올게.” 발걸음을 떼는 선생님 뒤에서 형진이가 “안녕~ 안녕~” 하며 끝없이 손을 흔든다.

모레(20일)는 봄비가 내려 곡식이 윤택해진다는 곡우다.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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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학교(학급) 순회교사 제도

학교 내 특수교육이 어렵거나 등교가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 특수교육을 담당하는 교원이 가정이나 의료기관, 학교 등을 순회하며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1994년 제정된 ‘특수교육진흥법’에 따라 시행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확대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 같은 순회교육을 받고 있는 장애 학생들의 수는 모두 3015명, 순회교사 수는 734명이다.

‘특수교육진흥법’에서는 특수교육 대상자가 1인 이상 12인 이하인 학교는 1학급 이상, 13인 이상인 학교는 2학급 이상의 특수학급을 두도록 하고 있다. 5월 26일부터 시행되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은 학생 수를 대폭 줄여 특수교육 대상자가 1인 이상 6인 이하인 경우 1학급을, 6인 이상인 경우 2학급 이상을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법적 강제력이 없어 각 시·도 교육청의 사정에 따라 임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장애인교육권연대의 윤진철 간사는 “1명 이상의 장애 학생이 있을 경우 특수학급을 설치하도록 한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해진다”며 “특히 각종 교육과 복지 서비스에서 소외되기 쉬운 도서벽지 장애 학생들의 경우 매일 학생들을 돌봐주는 전담교사 배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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