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논단>금융약관 심사강화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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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얼마전 은행 약관 심사과정에서 한 은행간부는 『내년에는 금융시장이 개방돼 불가피하게 약관을 세계 수준으로 고쳐야 겠지만 그때까지는 현행 약관을 그대로 쓰게 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약관의 잦은 변경으로 업무가 복잡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개방 전까지는 우리 관행대로의 약관을 그대로 써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아 유감스러웠다.
서비스분야에서는 약관 그 자체가 상품의 내용이다.예컨대 자동차 할부판매에서 상품은 자동차고 약관은 대금지급방법에 관한 것이지만 예금상품의 경우 약관 자체가 상품이 되는 것이다.
서비스부문에서 경쟁이 심해지면 상품의 질과 관련된 분쟁도 늘어나고 결국 약관조항의 공정성에 대한 요청도 지금보다 높아질 것이다.경쟁이 격화되면 서비스 수요자에 대해 좋은 거래조건을 제시해야만 거래를 성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공정성의 판단기준이 향상될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의 약관심사제도는 국제적으로 수준급인가.
한마디로 말해 서비스부문에 관한 한 우리의 약관심사제도는 매우 낙후돼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선 은행약관은 약관 심사의 간판격인데도 공정거래위원회의 약관심사에서 상당한 예외조치를 인정받고 있다.즉 공정위는 은행약관이 약관규제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은행감독원에 그 사실을 통보하고 그 시정에 필요한 조 치를 취하도록 권고할 수 있을 뿐이다(약관규제법 제18조1항).
원래 은행약관은 86년 약관규제법이 제정된 이래 약관심사의 핵심을 이뤄왔으나 92년 법개정에 의해 예외규정이 삽입되면서 공정위의 심사를 피하게 됐다.
또 보험약관은 관청의 인가약관이라는 이유로 예외조치를 인정받고 있다.공정위는 인가약관에 대해 당해 행정관청에 사실을 통보하고 그 시정에 필요한 조치를 요청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시정명령은 하지 않는다(제18조 1,2항).
이같은 은행약관과 보험약관에 대한 예외조치는 옳지 않다.공정위의 약관심사는 결국 은감원 및 인가관청(특히 재경원)의 의지에 좌우되는데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약관심사는 전문적인 식견과 경험을 갖춘 심사기관이 해야하는데 은감원이나 인가관청은 약관 심사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지못하고 있다.
둘째,약관 심사는 중립성을 지닌 기관이 해야 하는데 은감원과인가관청은 은행이나 보험사에 온정적인 것이 보통이다.
셋째,약관 심사는 사후심사제도이므로 사전심사기관과 별개의 독립적인 기관이 담당해야 하는데도 은감원이나 인가관청은 심사대상약관의 작성에 관여했으므로 독립성을 갖지 못한다.이미 자신이 인가한 약관에 대해 그를 번복해 시정조치를 가하 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시장개방에 대비해 서비스상품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약관규제를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약관에 대한 사전심사를 강화하는 것은 행정규제를 강화해 기업의 창의력을 약화시키므로 피해야 한다. 결국 공정위가 약관에 대한 사후심사제도를 잘 운영하도록 제도와 인적 구성이 정비돼야 할 것이다.특히 시급히 요망되는 것은 은행약관 및 보험약관이 약관 심사를 우회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정면으로 심사를 거치도록 절차를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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