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꽃놀이 군대가 어찌 패하지 않으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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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조선 중기의 국토 방위개념이다. 전시상황이 되면 여러 지방관 휘하의 소규모 병력이 한 지역에 집결해 대규모 편제를 이룬 뒤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수의 지휘를 받는 걸 말한다. 이전의 방위체제는 각 지역에 전략적 중요도에 따라 크고 작은 진을 설치해 지역단위로 방어하는 진관제(鎭管制)였다. 스포츠 용어를 빌려 진관제가 지역방어라면 제승방략은 대인방어인 셈이다.

얼핏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제승방략 체제는 임진왜란 때 아주 거덜이 난다. 집결한 병력이 지휘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군을 만나 우왕좌왕하다 괴멸되는 일이 속출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역별 방위가 아니어서 한두 번 패배로 광역 방위체제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그 상황이 묘사돼 있다. “고을 수령들은 자기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냇가에 노숙하며 순변사(巡邊使)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고 적군은 점점 가까워지므로 군사들이 놀라 동요했다. 마침 큰비가 와 옷이 젖고 양식까지 떨어지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며 수령들도 도망쳐 버렸다. 순변사가 도착해 보니 텅 비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유성룡은 패전을 제승방략 탓으로 돌리고 진관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허물을 뒤집어쓰기엔 제승방략도 억울한 측면이 있겠다. 양반관료층에 땅을 빼앗긴 자영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양인개병(良人皆兵)의 원칙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게 제승방략인 까닭이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으로 전세를 뒤집은 비결도 따지고 보면 제승방략을 따른 결과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문제는 틀이 아니라 틀 안의 사람들이었던 거다. 조선은 개국 이후 200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해 오면서 한없이 느슨해져 있었다. 각지에서 모인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평소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수령들이나 백성들에게 정기적인 군사훈련은 그저 성가신 가욋일이었다. “태평성대에 웬 군사훈련?”이었던 거다. 심지어 전쟁이 임박해서 성을 쌓아 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져도 노역을 꺼리는 원망 소리가 거리에 넘쳤다.

유성룡은 이렇게 개탄한다. “친구가 편지를 보내 ‘우리 마을은 강물이 앞을 막고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는가. 무엇 때문에 공연히 성을 쌓느라 백성을 괴롭히는가’라고 했다. 도대체 만리나 되는 큰 바다로도 왜적을 막지 못하는데 한 줄기 좁은 강물을 쉽게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다니(…) 사람들 의견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옛날 얘기가 장황했던 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아서다. 지난주 우리 국방장관의 지적이 유성룡의 탄식처럼 들렸다. 그는 전군 주요지휘관들 앞에서 “강한 군대보다 편한 군대를 선호하고 그것이 곧 민주 군대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싸워 이기는 전투형 군대보다 사고 안 나는 관리형 군대로 변질되고 있다”고도 했다.

역시 제도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늘 한 발 앞서 문제를 만드는 거다. 언제부턴가 우리 군은 편한 군대 만들기 경쟁을 벌여 왔다. 부대마다 훈련장보다 게임방과 노래방 시설 자랑이 우선이다. 장교들은 사병들 눈치 보기 바쁘다. 일병이건 병장이건 서로 반말하며 ‘아저씨’라 부르는 부대도 있다고 한다. 그런 ‘당나라 군대’가 모범부대로 상을 탔다니 말 다했다. 휴전 상태로 대치 중인 나라에서 말이다.

햇볕정책은 옳은 길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우리 군이 느슨해질 이유를 찾지는 못한다. 당장 통일이 된대도 마찬가지다. 군은 어떠한 잠재의 적과 ‘오늘 밤 당장 전투를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대비가 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와 지금의 군대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군인은 전투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국방장관의 말만큼이나 유성룡의 질책은 역사가 증명하는 시대불변의 진리다. “군사행동을 봄날 꽃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으리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