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眞相 철저히 규명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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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대 가명 계좌설」이 정가(政街)를 강타하고,많은 국민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발설한 서석재(徐錫宰)총무처장관이 경질되고,머뭇거리던 정부는끝내 여론에 밀려 진상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광복 50주년을 목전에 두고 터진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이른바 5,6共이 차지하는 위치를 되씹게 한다.아울러 이번 사건은 김영삼(金泳三)정부의 과거 극복 의지와 개혁 정치의향방을 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취중발언」이 이처럼 엄청난 파장으로 번져가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국민들이 이 「說」의 높은 개연성 때문에 크게분노하는데 있다.
구체적인 액수가 얼마든,또 거명되는 두 전직 대통령중 누가 장본인이든 국민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책임지는 일국의 대통령이 집권기간중 천문학적 액수의 「검은 돈」을 챙겼으리라는 생각을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전율할 만한 일이다.가산국가(家産國家)적 왕조시대에도 있을 법한 일인가.
그러면 이러한 「신뢰의 상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그것은 건국이래 과거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성 결손의 누적에서 비롯된다. 특히 5共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을딛고 세워진 폭력정권이고,6共은 5共의 연장선상에 있던 의사(擬似)민주정권이었다.
역사의 큰 물줄기로 볼 때 한국의 군부 권위주의 시대는 1979년 유신정권의 종언과 함께 마감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를 10년 이상 공전(空轉)시킨 이들 정권은 실존했고,더욱이 권력 비리와 연관해 미증유의 부끄러운 유산을 남겼다.
김영삼정권은 이른바 「3黨통합」을 모태로 태어났고,그런 의미에서 지난 군부 권위주의 시대와 연관돼 있다.이러한 「태생적 한계」는 그간 문민정부의 운신(運身)의 폭을 좁히고 개혁정치의향방을 왜곡한게 사실이다.
최근 12.12 군사반란죄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때문에기소유예하고,5.18 내란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힘의 논리로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도,현 정부와 구정권 사이의 내적 연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정부의 조사 결정도 형식적인 「해명성 조사」에 그칠 것이라는 강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더욱 증폭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김영삼정부는 지난 6.27 지방선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이후 이제 집권 후반기를 맞아 국정 쇄신을 통해 민심을 다시 추스려야 할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부에 권하고 싶은 것은「정권적 시각」에서벗어나 「국민적 시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국민적 관점에 서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 만천하에 밝히고,이를 계기로 개혁정치에 관한 불퇴전(不退轉)의 의지를 표명할 때 김영삼정부는 국민의 믿음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 이번 사건은 金정부에 위기라기 보다 역전(逆轉)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요즘 우리 정치세계에는 정치적 도덕성이 상실되고 현실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고질병인 지역할거주의는 차치하고라도 5,6共세력의 정당 창당설이 공공연히 회자(膾炙)되고 있고 이들을 끌어들이려는 기성 정치권의 손짓도 요란하다.
그러나 이제 광복 반세기를 맞아 어두운 지난 시대는 철저하게장송할 때다.
과거 극복의 포기는 바로 개혁의 실종을 의미한다.
이제 김영삼대통령은 각고의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延世大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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