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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 얼굴·이름 공개하라” 부글부글 네티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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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05면

4일 일산 어린이 납치 미수사건 현장검증에 피의자 이모(41)씨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나왔다(왼쪽). 이날 현장검증을 지켜본 일부 시민들은 이씨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항의했다. 지난해 6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해사건의 피의자가 수갑을 찬 채 현장검증을 한 뒤 사법경찰관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중앙포토·AP

“온 세상에 얼굴을 공개해서 수치심 느끼도록 해야 한다.” (ID pure)
“인권 좋아하네. 짐승한테 무슨 놈의 인권?”(ID kidfuture)
네티즌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안양 초등학생 예슬이ㆍ혜진이 유괴 살해사건,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사건 등 어린이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들에 대한 분노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이름도 정모·이모씨 등 익명으로 나오는 피의자를 “가만히 놔두고 볼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이슈ㆍ청원방’에는 ‘살인ㆍ유아 및 성 관련 범죄자들 얼굴을 공개하라!’는 제목으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일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에 5일 현재 9100여 명의 네티즌이 참여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개설된 ‘흉악범죄자 얼굴ㆍ신상공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토론방에는 “흉악범들의 얼굴과 신상을 친절하게(?) 보호해준 수사당국과 인권위가 재범을 양산하는 주범”이라는 내용의 비아냥 섞인 댓글이 여러 건 올라왔다.

경찰·인권위 비난 글 잇따라
흉악범이나 파렴치범의 신상 공개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4년 7월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모자와 얼굴마스크를 벗기기 위해 돌진하던 유가족 정모(51)씨가 이를 막는 경찰관에게 발길질당한 사건이 벌어져 파문이 일었다. 당시 정씨는 “살인마의 얼굴을 전 세계에 알려 망신을 주고 싶었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유영철을 보호한(?) 경찰을 비판했다. 2006년 2월 청소년 성범죄자의 사진과 세부 주소를 지역 주민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피의자의 인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인권위 홈페이지에 1200여 건의 비난성 글이 올라왔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조항”
검찰·경찰과 인권위의 입장은 ‘넷심’과 거리가 있다. 검찰청·경찰서 로비에는 ‘피의자·참고인을 허가 없이 촬영할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2005년 10월 제정된 경찰청 훈령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도 범죄 피의자에 대한 ‘초상권 침해 금지’ 규정을 명문화해 놓고 있다. 공개수배를 할 때에도 살인·강도·강간 등 흉악범 가운데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수사기관이 피의자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권위의 권고를 반영한 결과다.

경찰청 인권보호계의 한 관계자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피의자라도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 이전까지는 무죄로 본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이 모자와 마스크로 피의자의 얼굴을 가리는 것이 합당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피의자가 현장검증할 때 수갑 찬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권위원회의 입장도 경찰과 다르지 않다. 육성철 사무관은 “시민들이 범죄자에 대해 분노심을 갖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범죄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과 별개로 망신을 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육 사무관은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지 않거나 중형을 선고하지 않아 흉악범죄가 늘어난다는 논리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일본은 알권리 중시
경찰과 인권위의 이런 입장에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만만찮다. 인권 선진국인 일본과 미국 등에서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언론을 통해 흉악범들의 얼굴과 신상이 공개되는데 한국만 유독 범죄인의 얼굴을 보호해주느냐는 지적이다.
아주대 이진국(법학) 교수는 “미국의 경우 공적인 관심사와 관련돼 있고, 사안이 중한 범죄일 경우 피의자의 초상권ㆍ인격권보다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한다”며 “언론이 얼굴과 실명을 공개해 소송을 당하더라도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 법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연쇄살인범, 성추행범과 같은 강력사범에 대해서는 범죄 보도의 시사성에 맞춰 초상권이나 인격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해 언론보도가 우리나라보다 자유롭다”고 설명했다. 독일은 유명인이거나 공적 관심이 증폭된 범죄인을 ‘시대사적(時代史的) 인물’로 분류해 이중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는 언론이 신상공개를 할 수 있지만 출소해 사회에 복귀한 뒤에는 보도를 엄격히 제한한다.

법조계는 대체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옹호하는 쪽에 서 있다. 2004년 9월 유영철 사건 재판 때 서울중앙지법은 유씨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원 안에서 사진촬영과 비디오 녹화 하는 것을 금지했다.

박형상 변호사는 “사회적 영향이 크고 흉악한 범죄인 경우 유죄 개연성이 매우 높을 때 암묵적 합의에 의해 언론이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하지만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죄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초상권과 인격권을 보호해 주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형이 확정되더라도 범죄의 내용과 사회적 영향력이 중대하지 않으면 공개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흉악범죄가 늘어나는 현실은 이런 원칙론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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