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수사 이모저모-새로 밝혀진 관련자들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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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번 검찰수사 결과 「5.18」관련 상당수 정부.군 인사들의새로운 역할이 확인됐다.
강경파로 알려진 정부관계자가 실제론 군부의 정치세력화에 반대했고,적지않은 군 고위인사들이 광주진압.국회해산 과정등에서 신군부와 의견을 달리한 것으로 확인됐다.반면 조역(助役)에 머물렀던 인사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이 드러났다.
신현확(申鉉碻)총리는 당시 학생.재야인사들 사이에 대표적 강경파로 분류됐던 인물.그러나 그는 주요 사안마다 신군부의 결정에 반대의견을 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80년5월17일 오후4시20분 전두환(全斗煥)보안사령관은 申총리에게 국회해산.비상계엄 전국확대.비상기구 설치 등 3개항의시국수습 방안을 건의했다.이에 대해 申총리는 국회해산.비상기구설치에 정면 반대하고 비상계엄 확대조치에만 『대 통령이 결심할사항』이라며 유보적 자세를 취했다.
박동진(朴東鎭)외무장관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保委)설치에반대했다.그는 5월26일 권정달(權正達)보안사 정보처장이 국무총리실에서 보고한 국보위 설치안에 대해 비상기구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이후 노태우(盧泰愚)수경사령관이 그를 초청하여 무마하려 했다.
그밖에 5월17일 유병현(柳炳賢)합장의장은 신군부가 건의한 국회해산문제에 『군의 정치개입은 헌법위반』이라며 반대의견을 냈다. 반면 「5.18」개입 정도가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던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5월17일 밤 계엄확대 조치를 통과시킨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병력을 대거 배치해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했다.이에 앞서그는 5월14일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광화문 美대사관 앞에 수경사 6개 중대를 배치했다.
그는 또 3월6일 제1차 충정회의를 주재,학생시위 주동자를 이상주의적 맹목저항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시위진압을 위해 군투입등강경책을 마련했다.
〈李圭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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