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탄핵보다 더 심각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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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별일도 다 있다. 한국 안에서는 대통령 탄핵 사태로 큰일났다며 야단들인데, 외국의 신용평가회사는 별일 있겠느냐며 태평이다. 무디스 측은 "탄핵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한국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며 4월 총선 뒤엔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 했단다. 1997년 금융위기 때와는 영 딴판이다. 한국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고 그렇게 역설을 했음에도, 국가신용도를 한꺼번에 8단계씩이나 떨어뜨리며 야박하게 굴던 그들이 지금은 도리어 '뭘 그리 야단들이냐, 한국정치가 언제 조용한 적 있었느냐'식의 태연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무디스든 S&P든 간에 국제적으로 이름난 신용평가회사들도 터무니없는 구석이 많다. 한국의 신용을 8단계나 한꺼번에 내렸다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의 자기네 평가실력이 얼마나 엉망이었나를 증명해주는 것 아니겠나. 물론 금융위기의 본질은 한국경제 스스로의 잘못에서 비롯됐지만,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고 바가지도 많이 썼다. 인도네시아나 태국.필리핀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는데, 아무리 한국경제가 어려웠기로서니 너무 심했었다.

난 이들의 신용평가를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경제 상황을 박정희 대통령 암살 때나, 97년 금융위기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 아무튼 국회의 대통령 탄핵에 따른 소요를 가지고 국가경제의 마비현상으로 비약시키는 것은 기우다. 과도한 정치적 흥분만 평소 수준으로 진정시켜주면 외국자본 탈출로 대변되는 금융패닉 현상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이젠 하도 외국돈이 많이 들어와서 함부로 빠져나가기도 어렵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더 심각한 데 있다. IMF 금융위기 같은 비상대책을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이지, 비실비실하는 한국경제를 살려나갈 근본적인 방책을 찾는 일은 갈수록 꼬이고 있는 현실이 문제다. 탄핵사태는 어차피 벌어진 일. 헌법재판소 최종판결이 어찌되든 간에 총선과 맞물려 일어날 대혼란은 예정돼 있는 진행코스다. 그걸로 금년 한 해를 다 지새워도 모자랄지 모른다. 탄핵 그 자체보다도 탄핵 시비로 빚어질 정치적 혼란이 가져다 줄 경제적 부담이 더 심각하다.

경제에 관한 한 지난 1년 노무현 정권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대통령 본인은 잘했다, 책임 없다 주장했지만, 자신이 구성한 경제팀을 1년 만에 통째 갈아치운 것 하나만으로도 실패를 자인(自認)하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盧대통령 자신도 노조지도자들에게 "나는 변했음"을 선언했겠는가. 그리하여 올해부턴 진짜 경제살리기에 몰두할 것을 여러 차례 다짐했었고, 사람도 많이 바꿔 심기일전하려는 참인데 또 사단이 난 것이다.

더 이상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노무현 대통령한테서 기대됐던 변화의 핵심은 노동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말로는 변심을 토로했으나 정작 행동으로 어찌 보여줄지가 관심사였다. 사실 盧대통령에겐 노조지도자들이 친구이자 동료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정말 싫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심을 선언해야 했던 것은 '늘어나는 실업, 줄어드는 일자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뒤늦게나마 깨달았던 때문이리라.

산업공동화 문제이든, 외국투자 유치든, 동북아 중심 추진이든 간에, 어느 것 하나 노동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서는 될 일이 없다. 이걸 해결 못하면 개혁이고 성장이고 한 발짝도 못 나간다. 눈앞에 닥친 주5일제 근무 실시, 비정규직 문제 등을 여하히 풀어내느냐가 발등의 불이다. 노동시장의 확실한 안정만 찾는다면 탄핵이고 뭐고 한국의 국가신용도는 확실하게 치솟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 과연 노동문제의 고민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뜻에서 총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어느 당이 1당이 되든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 그에 상관없이 총선 이후쯤부터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댈 노사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가 최대 관심사다. 또 누가 알겠는가. 탄핵의 충격파가 드라마틱한 대화합의 장을 연출해 낼는지.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