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金大中선생님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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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생님.
최근 선생님은 대통령선거패배 후의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했으며,그리고 이 선언이 있자마자 선생님의 추종세력들은 신당창당에 돌입했습니다.
상식적인 기준에서 볼 때 선생님의 행동은 실망 그 자체입니다. 실망의 이유는 분명합니다.선생님의 정계은퇴 번복 선언은 대권(大權)이라는 「목적」을 위해선 정직이라는「가치」는 묵살되어도 좋다는 행동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선생님처럼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정치지도자는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선거에 나서서 세번씩이나 실패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행동은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습니다.따라서 대권도전이라는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憎」이지만 민주주의 구현이라는「이상정치」에 있어서는 「愛」인 것이 분명 합니다.
사실 선생님처럼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권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정치인은 없었습니다.유신(維新)독재로부터 新군부독재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정치일선에서 강제로 퇴장당한 정치인은 오직 선생님뿐이었습니다.어디 그 뿐입니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죽음의 고비를 몇번씩이나 넘겼으며,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영어(囹圄)의 몸으로 오랜 기간 가족과 단절된생활도 강요당했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신 부친이 영어의 몸이 되신 적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이런 선생님이 대통령선거에서 졌을때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정계은퇴를 깨끗이 선언했을 때 크게 감격했습니다.민주주의 수호자로서,그리고 삶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 김대중」의 모습을 정계은퇴 선언에서 극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수많은 개혁을 수행했음에도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제 판단으로는 국민을 깔보는 듯한 현 정부의 오만 탓이라고 생각합니다.지난번 지방자치선거에서 야당이 크 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야당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 오만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이같은 상황에서 선생님의 은퇴선언번복은 金대통령이 저지른 오만을 또 다시 답습하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님이 정치재개를 선언한 이상 목표는 또 한번의 대권도전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선생님이 대권에도전하는 경우 그것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명분들을 제시할 것입니다.그렇지만 아무리 훌륭한 명분을 제시한다 할 지라도 지도자로서 일관된 소신과 정직의 가치를 결코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 국민은 경제개발의 수혜를 만끽하고 있지만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국가개발론」이 민주주의 실천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님의 논리를 누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바로 이런 점을 잘 알고 계시는 선생 님이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실망에 앞서 안타까운 심정일 뿐입니다.
설령 선생님이 앞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할지라도,그리고 대통령직을 훌륭히 수행한다 할지라도 저는 공인(公人)으로서의 말을번복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남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역사는 목적합리성보다는 가치합리성에 의해서 기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특히 한국의 역사는「능력있는」지도자보다는「의로운」지도자를 보다 높이 평가하는「의인(義人)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많습니다.따라서 능력있는「대통령 김대중 」보다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김대중 선생님」이 역사에서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성균관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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