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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박정희시대’에 다시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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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의 책·담론·지식인 김호기 교수의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 ②

■‘박정희 19년’은 현대사 격변기… 사망한 유령 불러낸 ‘사회양극화’
■ 진보학자 조희연, 긍정적 측면에 주목… 일방적 ‘옹호 & 거부’ 넘어서야
■ 明,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暗, 정경유착·인권탄압·생태계 파괴
■‘박통’ 철학 정당화한 ‘정치적 도덕가’… 학자적 인품 & 학문 성과 탁월

▶1961년 5월18일 서울시청 앞에 선 쿠데타 주역들. 왼쪽부터 박종규 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

월간중앙 가난으로부터의 엑소더스(exodus). 소위 ‘박정희시대’로 통하는 1960~70년대의 화두는 ‘산업화’였다. 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은 ‘개발독재’라는 이름의 기나긴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치달았다. 우리는 이 산업화시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연세대 김호기 교수가 두 번째 지적 모험에 나선다.


훗날 역사가들은 건국 60년을 돌아볼 때 가장 주목할 정치가로 누구를 꼽을까? 이념을 떠나 보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 전 대통령은 건국을 넘어 산업화시대를 열었다.

1961년부터 그가 돌연 세상을 떠난 1979년까지 19년의 ‘박정희시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가 컸던 시간이다. 또한 경제적 모더니티(modernity)가 격렬하게 진행된 시간이다.

개인적 경험을 돌아봐도 그렇다. 196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필자가 1970년 도시로 이사하기 전까지 그곳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심스레 남포의 그을음을 닦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열 살 때 의정부로 나온 이후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고, 아파트에 처음 가봤으며, 고속버스를 처음 타보기도 했다. 필자의 현대적 체험 또는 모험은 박정희시대에 시작됐다.

박정희시대 1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 기간에 우리 사회는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바뀌어 갔다. 모더니티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면 우리 역사에서는 박정희시대에 와서야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신세계의 모험이 시작된 셈이다.

지식사회 역시 박정희시대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어용’과 ‘재야’의 이분법이 등장한 것도 박정희시대였다. 실제로 박정희체제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당시 지식사회는 물론 현재의 지식사회를 가늠하는 중요한 이분법 중 하나다.

진보적 지식사회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큰 리영희(79)·강만길(75)·백낙청(70) 등은 1970년대 박정희체제에 맞선 지식인들이었다. 보수적 지식사회의 경우 박종홍·이용희·남덕우(84) 등은 박정희에 의해 중용된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각각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으며, 산업화시대가 시작된 이래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 지식사회에서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고 봐야 한다.

진보 & 보수 양 지식 진영에 큰 영향 끼쳐…

현재 우리 지식사회를 주도하는 50대 지식인 역시 박정희시대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표적 진보 사회학자 조희연(52)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운동과 시민운동을 이끌어 왔다.

최근 그는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시대를 재분석해 주목받기도 했다. 이 책은 비판적 관점에서 박정희시대를 검토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포함해 박정희체제의 긍정적 측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한다.

이런 조희연의 양면적 평가는 박정희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진보적 지식인이 갖는 복합적 내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박정희체제가 명암을 가짐에도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는 최근 우리 사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사회적 양극화’가 강화되고 적지 않은 국민이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면, 이런 삶의 불안정성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바로 그곳에 강력한 리더십으로 상징화한 박정희가 존재한다. 박정희식 모델이 옳아서가 아니라 현재의 곤궁(困窮)이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박정희시대에 대한 정치적 독법(讀法)이다.

박정희시대는 29년 전 마감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최근 정치세력들의 정당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 왔다. 박정희시대의 평가에 대한 과도한 이분법이 강조되는 것도, 박정희시대의 과거사에 대한 규명이 논란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과잉 정치화한 역사 해석은 현재를 과거에 지나치게 묶어 두게 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역사의 해석에서 반드시 합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보는 눈은 복수(複數)일 수 있다.

때문에 열린 토론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박정희 리더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박정희시대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해석이 아닐 것이다.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그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박정희시대에 대한 더욱 객관적 평가는 이뤄져야 한다.

■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
- “산업화 외친 쿠데타 주역 박정희의 프로파간다”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선생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

해방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군인이 돼 김종필(82)·김형욱·이후락(84) 등과 함께 1961년 5·16 쿠데타를 감행하며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간 5·16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쿠데타 주역들은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 등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 정치활동’이 쿠데타라면, 5·16은 명백히 쿠데타다.

문제는 쿠데타가 낳은 결과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3년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산업화를 향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필자는 몇 년 전 박정희시대에 관한 글(‘박정희시대와 현대성의 명암’,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나남, 1999)에서 박정희시대를 우리 근대화의 큰 전환기라고 말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는 1960년에 64%던 농·어민이 1980년에는 31%로 감소했다. 또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산업이 1차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추었다.

생활수준과 생활양식 역시 크게 변했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979년에는 1,597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더불어 급속한 경제성장은 아파트·텔레비전 등으로 대표되는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급했고, 팝뮤직·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 동안 학술적 토론을 비롯해 정치 비사(秘史), 개인적 회고담, 소설화 또는 영화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조명돼 왔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코드 중 하나다.

개발 & 독재, 논란 속 두 수레바퀴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민족의 영웅’에서 ‘독재의 원조(元祖)’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뤄져 왔다. 그리고 정치사회에서는 그의 딸인 박근혜(56)가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풍경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1979년에 사망했으나 역사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 있고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박정희의 대표적 저작이다. 이 책은 1963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고를 박상길이 정리한 것이다. 박상길에 따르면 이 책은 박정희의 저작 가운데 철학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박정희의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1963년 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서기 직전에 씌어진 만큼 박정희의 정치철학이 집약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5·16 쿠데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혁명이며, 국가의 재건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혁명의 연장선상에 1960년대의 조국 근대화 전략이 놓여 있다. 박정희는 가난이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말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를 강조한다.

자립경제 건설은 “혁명을 통한 민족국가의 일대 개혁과 중흥 창업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하는 문제의 전부이며, 그 관건”임을 주장한다. 자립경제에 대한 그의 열망은 앞서 지적했듯 19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박정희시대의 산업화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쟁점은 경제적 산업화에 권위주의 정치가 불가피한 것인가의 문제다.

이는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개발독재를 선택해야 하는가, 경제성장과 사회 안정이 인권과 정치적 자유보다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대 당시의 시선에서 보면 박정희식 발전 모델은 상당한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사회 안정에 대한 희망을, 보릿고개의 암울한 현실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을 낳았으며, 이런 희망과 열망은 위로부터의 국가적 동원을 통한 산업화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개인적 체험을 돌아봐도 1970년에야 전깃불 아래 살 수 있었던 필자는 1979년 대학을 입학할 때는 이미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두루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성공했다고 해서 박정희식 모델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식 모델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있다. 1969년 ‘3선개헌’에서 1972년 ‘10월유신’에 이르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 특히 유신체제의 암울한 독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가를 웅변한다.

박정희 & 신경림, 따로 또 같이

▶위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아래 박정희시대의 풍경. 마을 사람들이 취수로 작업을 벌이고 있다.

물리적 폭력에 기반을 둔 침묵의 사회야말로 박정희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요컨대 박정희시대는 그 명암이 뚜렷한 시대다.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고도성장을 가져온 시대였던 동시에 정경유착·인권탄압·생태계 파괴 등의 대가를 요구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박정희시대에 뿌리내린 성장주의와 군사문화로 대표되는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의 심층의식을 이뤄 왔다는 점이다.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시적 표현이 나온다.

“땀을 흘려라! /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 노래로 듣고 / … / 이등 객차에 / 불란서 시집을 읽는 / 소녀야. / 나는, 고운 / 네 / 손이 밉더라.”

이어 박정희는 “고운 손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며, 따라서 ‘피와 땀과 눈물’로 기적과 발전을 이루자”고 호소한다. 이 구절을 읽으며 필자는 민중시인 신경림(72)이 1960년대에 쓴 시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 … /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신경림, <겨울밤>, 1965)이라고 1960년대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증언한다.

박정희와 신경림의 이념은 물론 다르다. 박정희가 보수적 시각에서 현실을 비판한다면, 신경림은 민중적 시선으로 현실을 응시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신경림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1960년대에 대한 두 사람의 현실인식에서 공통점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중의 삶의 조건에 대한 시선이다.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와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다소 극단적 사례일 테지만, 두 사람 모두 주어진 현실을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공유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비서구사회 모더니티에 내재한 어떤 슬픔이나 열망과 대면한다. 가난과 빈곤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이뤄 왔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집합적 열망은 더할 나위 없는 대중적 호소력을 갖게 했다.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 보여줘…

역사의 해석은 고정돼 있지 않다. 박정희체제는 ‘발전국가’체제 또는 ‘개발독재’체제다. 개발독재는 경제적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결합돼 있다는 의미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고, 3선개헌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으며, 나아가 1인지배의 유신체제를 만든 독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모색했고,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으며, 의료보험을 포함한 복지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런 두 얼굴을 가진 박정희였기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에 열광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의 시대를 부정한다.

두 얼굴의 박정희시대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민족주의’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주요 이념의 하나로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순얏센(孫逸仙·孫文)의 중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일본, 케말 파샤의 터키, 나세르의 이집트 등 민족주의가 두드러진 외국 사례들을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시대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퇴폐한 민족 동의와 국민 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데타의 공약은 5·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흔히 박정희의 역사적 라이벌로 지목되는 장준하도 당시 쿠데타를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런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긴장을 이뤄 왔다는 점이다.

민족주의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대외적으로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면서 대내적으로는 체제 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이기도 하다.

민정이양을 전후로 구사되기 시작한 ‘민족적 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구와는 다른 한국적 전통을 부각시키고 냉전체제의 반공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서구적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담당했다.

1972년 10월유신에서 그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됐으며 결국 선거, 토론, 집회 및 결사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마저 부인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타났다.

■ 박종홍의 <박종홍 전집>
- “時代의 선비가 집대성한 한국철한 종합서”

1968년 12월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 이 헌장은 박정희시대의 민족주의를 집약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에 대해 4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나름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해방 이후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박종홍은 이 국민교육헌장의 주역이었다. 이 헌장은 박종홍 등이 초안을 잡고 박정희도 문안의 완성 과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국민교육헌장은 해방 이후 최고의 철학자와 최강의 권력자가 함께 만든 공동 작품인 셈이다.

지난 60년간 우리 사회 학문분야에서는 대표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존재했다. 국문학의 조윤제, 국어학의 최현배, 역사학의 이병도, 법학의 유진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학계를 주도했다.

박종홍은 철학계를 대표한 지식인이었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으로서의 한국철학의 기틀을 세우고 지식사회로서의 철학계를 이끌었다. 사후 출간된 <박종홍 전집>을 보면 <철학개론>에서 <한국사상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종합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좌 1968년 12월5일을 기해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됐다.
우 1970년 서울 말죽거리(현 양재역) 일대를 개발하고 있다.

‘나’ 아닌 ‘우리=국민=민족’ 강조해…

대기만성형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는 박종홍. 그의 최고 업적은 <한국사상사>다. 하지만 이 책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불교사상편’은 생전에 출간됐지만 ‘유교사상편’은 사후에 엮어져 나왔다.

원효에서 의천을 거쳐 지눌까지, 퇴계에서 율곡을 거쳐 다산까지 이르는 우리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의 흐름은 그 이전에도 주목받았다. 박종홍은 이런 사상의 역사적 진화와 발전에 내재된 고유한 특징을 탐구했다.
예를 들어 우리 불교사상의 특징을 그는 ‘회통(會通·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해 조화롭게 함)에서 찾는데, 이는 우리 학계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큰 견해다.

필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한국사상 탐구에서의 그의 시각이 집약된 서론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글을 우리말로 우리 사유를 이야기한 최고의 글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는 한국 사상이 “하루아침에 그 어느 개인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이 한반도에서 생을 영위한 우리 선조들이 두고두고 피와 땀으로 싸워 얻은 고귀한 체험의 발로”라고 본다.

이런 박종홍의 사유는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세계화시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 아카데미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학문적 태도의 한 전형을 이룬다. 박종홍은 철학자로서 자신이 강조한 ‘현실’에 대한 실존주의적·실용주의적 접근을 중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그는 한국사회로 돌아왔으며, 그것은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민족주의로 기울게 했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의 지도이념이 떠난 정치투쟁도 경제계획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거니와 이 한국의 지도이념이란 딴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사상이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의 이름”임을 강조한다.

필자는 한국사상에 대한 이런 독해의 연장선상에 바로 국민교육헌장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교육헌장과 박종홍 철학의 상관성에 대한 지적은 여러 사람에 의해 이뤄져 왔다.

동국대 홍윤기(51) 교수는 박종홍이 결국 박정희의 국가지상주의와 반공민주주의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으며, 이는 박종홍이 파악한 국민정신과 민족정체성이 분단체제적 이해와 전체주의적 논리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우리=국민=민족’의 논리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특권화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개인보다 국가를 우위에 두게 된다.

국가를 중시하는 국가주의를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상 독일과 일본으로 이어진 후발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강조됐으며, 이런 경제적 동원에서 국가주의는 상당한 성과를 이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주의가 갖는 그늘이다.

국가주의는 개인으로서의 시민보다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부각시킴으로써 결국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박정희시대 국가주의의 대표적 그늘은 억압적 감시체제였다.

▶1 1975년 4월3일 부산에서 개헌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저지로 후퇴하는 시위대.
2 1970년 7월 7일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3 유신정권은 자주 긴급조치를 선포해 사회를 억압했다.

여전히 존경받는 철학 巨人 박종홍

중앙정보부, 이른바 ‘중정’으로 대표되는 감시체제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중핵을 형성해 정치 및 경제사회는 물론 일반 시민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3,000명의 특무대 요원을 바탕으로 출발한 중정은 ‘권력 내의 권력’기관으로서 국내정치는 물론 대북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의 실질적 입안기관이자 집행기관이었다.

또한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는 박정희 1인 통치의 가장 강력한 친위부대였다. 이런 억압적 감시체제의 존재는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하는 통제 이전의 감금이 박정희체제의 중요한 정치적 지배 메커니즘이었음을 보여준다.

반공 논리와 군사문화가 일상화한 사회에서 반정부는 반국가와 등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김광규, <안개의 나라>, 1979)만 하는 침묵을 강요당한 나라가 다름 아닌 유신체제였음은 1979년 대학에 입학한 필자에게도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의 권력 참여는 비판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신정권에 참여했음에도 박종홍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박정희체제가 끝난 다음에도 그에 대한 존경은 그치지 않았다. 왜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그의 학문적 영향력이 너무 커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가 철학계 안에서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권력도 권력인 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이룬다.

박종홍에 의해 이뤄진 서양철학의 이해와 (특히) 한국사상의 재구성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 그가 지닌 뛰어난 학자적 인품이 그의 일탈을 관용하게 한 부분도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사적 기록이나 그의 제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박종홍은 탁월한 교수이자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동료와 제자들이 그에 대한 추억을 모은 <스승의 길: 박종홍 박사를 회상한다>는 의례적 헌사가 아니라 이 땅을 견뎌온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박종홍의 삶이 이해됐다는 것과 박종홍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지식과 권력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는 어느 사회든 지식인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경북대 김석수(47) 교수의 주장대로 박종홍은 권력 밖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비판해야 했음에도 ‘도덕적 정치가’가 아닌 ‘정치적 도덕가’의 길을 걷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시대를 돌아보면서 개인적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김수영은 박정희시대의 산업화가 이제 막 시작됐을 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김수영의 시, 그리고 말죽거리의 추억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10분 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김수영, <참음은>, 1963) 한다고 그는 적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봐도 이 시는 낡지 않았다. 조금씩 이뤄지는 말의 변주를 통해 김수영은 5·16 쿠데타에 대한 자신의 인내를 짐짓 차분하게 묘사한다. 말죽거리는 양재역이다.

이 양재역은 조선시대 도성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첫 번째 역이다. 1970년대 초반 돈암동에 있는 용문중학교에 다닐 때 이 말죽거리로 송충이를 잡으러 갔다.

송충이를 잡는 데도 대규모로 학생을 동원한 것은 역시 박정희시대다웠다. 하지만 초여름 우면산에서 모처럼 친구들과 바람을 쐴 수 있었던 것은 씁쓸하지만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역사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필자와 연배가 비슷한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45)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당시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필자와 같은 세대라면 적지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유하의 시를 김진표(31)가 랩으로 부른 대목이었다.

“내 인생의 책 속 찢지 못한 페이지, 내 맘 깊은 곳 잊지 못할 그때지, 담장 밖이 내게 준 건 내 전부의 구할, 담장 안 내가 받은 것은 남은 일할, 수많은 악칙과 악법, 연필보다는 주먹, 동료가 되기 전에는 적,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된 건, 내가 가진 상상력을 이 많은 법들 앞에 굴복시키는 것”(유하, <학교에서 배운 것>, 1999) 이라고 유하는 절규한다.

유하가 기억하는 유신체제는 국가주의 시대다. 국가주의는 산업화를 위한 경제적 동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국가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을 억압함으로써 결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의 외양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마감하는 현재, 국가주의의 위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세계화시대는 국가주의를 다시 불러내고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는 점증하는 외국인노동자나 국제 결혼에서 볼 수 있듯 다문화사회로 바뀌어가고 있기도 하다.

이미 우리 사회는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국가와 혁명과 나> & <박종홍 전집> 어떤 책인가?

“스스로 밝힌 조국 근대화론… 건국~산업화, 한국 철학 아울러”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열린 박정희시대. 이 시기는 건국에 이어 우리 사회에서 산업화를 연 시대였다. 박정희시대에 이뤄진 제도와 의식의 변화는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단숨에 바꿔 놓았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1963년 민정(民政)이양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가 자신의 국가관·혁명관·인생관을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밝힌 것. 이 책은 1997년 박정희의 열렬한 옹호자인 조갑제(63)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 해설을 붙여 다시 출간되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 책에서 자조·자립·자주를 기치로 조국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이 노선은 대한민국 산업화시대의 이념적 토대를 이뤘다.

해방 이후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박종홍. 선비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던 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의 기초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모두 일곱 권으로 이뤄진 <박종홍 전집>은 건국에서 산업화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철학의 지적 모험을 보여준다.

특히 불교와 유교를 다룬 <한국사상사>(<박종홍 전집> 제4권)는 우리 사상사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꼽힌다.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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