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인스턴트 지식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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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전 지구적으로 인스턴트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가 세계 곳곳에 침투하고 있으며, 심지어 커피 한잔을 놓고 오래 담소를 나누는 파리의 전통적 명물인 카페도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한다. 디즈니 영화를 보고 자란 젊은이들은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하기보다 당장 눈앞에서 감각적 자극을 주는 영상물을 선호하며, 성인이 되어 사물을 판단할 때에도 이성적 논리보다 감성적 이미지에 더욱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인스턴트 문화, 감성 위주의 사회 현상에 대해 미국 뉴저지 주립대 월트 휘트먼 센터 소장인 벤저민 바버 박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류 문명사에서 항상 어려운 것과 쉬운 것, 느린 것과 빠른 것,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이 경쟁해 왔는데, 이제 쉽고 빠르고 단순한 쪽으로 축이 너무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 사회의 놀라운 문화적 업적과 결부된 것들은 어렵고 느리고 깊이 있는 것들이고, 반면 "디즈니나 맥도널드, 그리고 M-TV가 호소하는 가볍고 빠르고 단순한 것들은 우리가 지닌 무관심.안이함.나태함 등에 상응하고 있어" 앞으로의 사회.문화 발전의 방향과 질(質)이 크게 우려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장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표로 연결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이미 이러한 사회적 조류에 편승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나 한국이나 TV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며, 내용보다 포장이 우선하는 정치 행태가 자리 잡은 지도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국회에서는 토론의 내용보다 TV 화면에 비친 모습에 더욱 신경쓰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이끌어가야 할 지식인들마저 정치인들처럼 가볍고 인스턴트화 돼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실에서 두툼하고 깊이 있는 논문을 쓰는 학자보다 신문에 원고지 10장짜리 시론을 쓰는 교수들이 대접받고, 그것도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을 앞세운 글들이 각광을 받는다. 그러기에 냉철한 이성에 기초한 현실 분석과 대안 제시보다는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힌 과격하고 선정적인 주장이 남발되고 있으며, 심지어 차분한 토론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대중에 먹혀드는 구호를 선점하는 순발력이 지식인의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풍토마저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지식계의 척박한 풍토는 이념적 대립과 세대 갈등에 지친 국민에게 통합의 원리를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적(敵)과 동지(同志)의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며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바버 박사가 지적한 바대로 제대로 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예를 들어 단순히 문제점을 지적하기에는 원고지 10장이 충분할지 모르지만, 여러 사안을 고려해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려면 수백쪽의 보고서가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같은 한 마디 구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정치가의 꿈이라면, 그 에너지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분출될 수 있도록 "어떻게 바꿀까"를 제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몫이다. 지식인이 이러한 구실을 못하면 구질서의 파괴는 가능해도 신질서의 확립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난 1년 동안 우리 지식인들이 이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심각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요즘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자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 이처럼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에서 지식인들마저 이념적 편향에 따라 갈등을 증폭시킨다면 사회 불안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차가운 머리'를 가진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 절실한 때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