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찾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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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11면

“신이 그 책을 보니 무뢰배가 잡소리를 모아 옛이야기처럼 만든 것으로 아무렇게나 이것저것을 섞어 놓아 무익하고 도리를 크게 해칠 뿐입니다.”

나는 왜 또다시 『삼국지연의』를 번역하는가

이 말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 기대승이 선조에게 『삼국지연의』에 대해 고한 것이다. 점잖은 유학자가 왜 이런 허황된 책을 읽었을까? 그것은 선조가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읽은 책이니 어떤 책인가 하고 보고는 깜짝 놀라 읽지 말라고 주청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삼국지연의』가 나온 지도 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미 이 책은 조선의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와 주상 전하마저 그 책의 내용을 훤히 알도록 탐독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500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500년이나 읽히는 동안 『삼국지』의 인물들은 하나의 전형성을 띠고 우리에게 이미지화 되었다. 선량한 지도자 유비, 간교한 조조, 충절의 화신 관우, 용맹무식한 장비, 지혜의 대명사 제갈량 등등. 그러다 보니 어느 샌가 이런 전형적인 이야기가 조금 지겨워졌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다른 관점의 『삼국지연의』들이 등장했다. 다른 관점은 신선하다. 그래서 주목 받기도 쉽다. 하지만 고전에 대한 이런 다른 관점은 때로 위험하다. 세대 간의 대화를 단절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라는 독특한 번역을 시도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일지도 모를 이 책에서 이문열은 인물들에 대한 평을 종종 삽입해 놓았다. 문제는 이 평이 일반적인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조카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다 읽었다기에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매우 의외였다. “다 나쁜 놈들밖에 안 나와요.” 유비의 착한 행동은 모두 위선이라고, 조조의 나쁜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일일이 평을 달아준 덕분에 그 책에는 정말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됐다. 그때 나는 처음 『삼국지』를 새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문열의 책은 무슨 문제를 가진 것일까?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다. 역사 속의 관점은 역사책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삼국지연의』가 가진 소설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삼국지연의』라고 부를 수 없다. 기대승이 선조에게 한 말, 허황된 책 『삼국지연의』. 이문열은 그런 기대승의 관점을 계승해 『삼국지연의』를 고치고자 했다. 그것이 『삼국지연의』의 본뜻을 훼손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삼국지연의』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모 신문사 인터넷 사이트에 2년이 넘도록 연재하고 지금은 블로그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글을 올리고 있다.

600년 전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백성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비는 매우 답답한 인물이다. 전략적으로 백성을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순간에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백성을 방패막이 삼은 유비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나관중이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그 장면을 쓴 것은 절대 아니다. 나관중은 그 순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모든 이익, 모든 계산을 버리고 백성과 함께하는 지도자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런 지도자가 있기를 바라는 기원이 그곳에 있다.

유비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다. 조조는 성공한 뒤에 가신을 죽이는 비정함을 보인다. 하지만 유비는 미방의 배반으로 관우가 죽음에 몰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방의 형인 미축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먼저 등을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나관중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가치가 세대를 넘어 전달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가치가 『삼국지연의』를 600년간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이다. 선과 악이 살아 있는 삼국지를 우리 세대의 언어로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일. 그것이 내가 『삼국지』를 새로 번역하고 있는 이유다.


이문영씨가 새로 번역하고 있는 『삼국지』는 http://samgukji.egloos.com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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