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국계 랍비 ‘개혁 유대교 운동’ 이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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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유대인처럼 생기지 않았네.”

한국인의 피가 절반 섞인 안젤라 워닉 북덜(36·사진)은 왜 자신이 유대인인지 설명해야 할 때가 많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대인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신자인 한국인 어머니와 유대인 아버지 사이에서 1972년 서울서 태어난 안젤라. 아버지 프레드 워닉은 주한 미군 부대에서 기술자로 일하다가 어머니 이술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안젤라는 다섯 살 때 워싱턴주 타코마로 이주한 뒤 계속 유대교 회당에 다니며 종교생활을 해왔다.

고교 때 랍비(유대교 율법교사로 종교의식과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는 종교학 전공으로 예일대를 마친 뒤 뉴욕에 있는 HUC(Hebrew Union College)에 진학해 2001년 아시아계로는 최초로 이 학교를 졸업했다.

99년엔 캔토어(유대교 의식에서 노래를 이끄는 사람)가 됐고, 2년 뒤 랍비가 됐다. 미국에선 한국계는 물론, 동아시아계로도 첫 랍비다. 현재 뉴욕 맨해튼에 있는 개혁 유대교 운동의 중심지인 센트럴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 노래로 신도들을 이끌고 있다.

그 역시 다른 혼혈 한인들처럼 외모에서 비롯한 성장통을 심하게 겪었다. 성별·인종·국적에다 종교 문제까지 뒤섞여 ‘나는 과연 누구인가’하는 정체성 문제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너무 한국인스럽다 싶으면 유대인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경쟁을 했죠.”

노란 얼굴의 유대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변사람들에게 지쳐 한때 유대인 되기를 포기하려고도 했다.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할 수 있겠니?”

‘어쨌든 너는 유대인이다’라는 확인이었다. 안젤라는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받아왔던 상처는 노란 피부와 불자인 한인 엄마가 있다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려던, ‘제 살 깎기’의 결과였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 입문 의식을 치렀다. 반쪽 한인으로서 유대교를 선택한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개종 의식을 거치면서 어머니의 존재와 그분의 문화를 인정하게 된 거죠.”

안젤라의 세 아이들에게도 한국 문화는 계속 이어진다. 큰아들인 가브리엘(8)은 다섯 살 때 태권도를 배웠고, 한국어 숫자도 셀 수 있다. 내년 여름 전 가족의 한국 방문도 계획하고 있다.

안젤라의 어머니는 한국의 한 사찰에서 1년간 살았을 정도로 독실한 불자다. 유대교 회당에서 히브리어도 배우고 유대 음식도 만들고 회당 성가대에서 노래도 하지만 여전히 불자다. 이런 어머니의 ‘개방된 영성’이 아버지의 ‘순수 유대성’보다 안젤라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세계(한국과 미국, 불교와 유대교)에서 최상을 취하면 된다는 ‘톨레랑스(관용) 마인드’가 안젤라의 종교적 시각을 넓혔다.

결혼에도 불교는 영향을 끼쳤다. 안젤라는 예일대 재학 중에 만난 남편 제이콥 북덜(변호사)과 타코마의 유대교 회당에서 96년 결혼했다. 결혼 하루 전에는 타코마의 한 불교 사원에서 한인 가족들과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조촐한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안젤라는 ‘다인종유대교연맹’에서도 일하고 있다. 백인·흑인·아시아인·유대인이 모두 어울리는 대동의 장을 실현하려는 큰 꿈을 품고 있다.

“모든 종교가 ‘빅 이슈’를 향해 함께 싸워나가야 합니다.”

안젤라는 모든 종교는 사회의 무너진 곳을 고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종교는 액션’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작게는 센트럴 시나고그 안에서 생활이 어려운 불법체류자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크게는 타종교와 연계해 합리적인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한인의 피가 흐르는 유대교 랍비 안젤라가 열어가는 개혁 유대교 운동의 앞날이 주목된다.  

뉴욕지사=조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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