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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40년’ 박태준 명예회장 “기술자를 대우 안 해 큰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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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건 신화도, 기적도 아니었다. 인간 의지의 승리였을 뿐이다. 세계 철강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포항종합제철. 2002년 이름이 포스코로 바뀐 이 회사가 4월 1일이면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박태준(81·사진) 명예회장을 빼고 포철을 말할 순 없다. ‘한국 제철의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그를 22일 서울 파이낸스센터 그의 사무실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이에 앞서 2월 28일 그를 별도로 만났으며, 3월 14일에는 포항을 방문해 제철소 곳곳을 둘러봤다.

그는 “한국 경제가 계속 번영하려면 기술 우위를 다지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기술자를 별로 위하는 것 같지 않아 큰 걱정이다. 중국과 인도가 저렇게 빨리 우릴 쫓아오고 있는데 지금 상태론 안 된다. 기술 개발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전문 5면>

-벌써 40년이 됐습니다.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까.

“내가 어떻게 두 개 다 했지? 솔직히 이런 생각이야. 포항과 광양, 두 곳의 엄청난 제철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해. 내가 역시 나이가 든 모양이야. 당시엔 그까짓 것 하며 달려들었는데…. 정말 그땐 일에 미쳤었지.” 

-스스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연산 1000만t 이상의 제철소를 두 개나 지은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곤 없어. 내가 보고 배웠던 신일본제철(신일철)에도 그런 사람은 없지.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를 끝내고 나니 ‘아,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러곤 후배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물러났지. 벌써 15년이 지났어.”

- 초기엔 참으로 막막했을 것 같아요.

“신일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87년 작고) 회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어. 박정희 대통령의 제철 입국 집념과 이나야마 회장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철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온갖 고생 끝에 73년 6월 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지. 그건 하나의 ‘사건’이었어. 모든 포철 직원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고, 대한민국이 공업국가로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어.” 

-자금 조달은 어떻게 했습니까.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어. 하지만 허사였어. 한국의 종합제철소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묘안을 짜낸 게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야. 박 대통령도 나의 이런 아이디어를 적극 지지했어. 3억 달러 중 당시 쓰고 남은 잔액은 7370만 달러였어. 여기에 일본 수출입은행에서 5000만 달러를 빌려오면서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썼던 세계은행(IBRD) 연구원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86년 런던으로 출장 갔을 때 문제의 보고서를 썼던 영국인 J 자페 박사를 만났지. 나는 포항제철 덕분에 한국에 조선소도, 자동차 공장도 생겨나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69년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자페 박사가 그러더군. 지금도 보고서를 쓴다면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때 자신이 파악하지 못했던 게 하나 있다고 해. 박태준이란 변수라는 거야. 박태준이란 사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틀린 보고서를 썼다는 얘기였지.” 

-포철이 쑥쑥 커가면서 일본 철강업계에서 한국에 너무 많은 기술과 정보를 준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고 하던데요.

“73년 103만t짜리 1고로를 예상보다 짧은 시간에 완공하는 걸 보고 일본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 그때 이나야마 회장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들었어. ‘이봐, 많이 가르쳐 준 게 문제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이 너무 강했던 거야. 우리 잘못이 아니라 그쪽이 워낙 잘했던 거라고.’”

- 제철소를 지으면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세 가지는 분명하게 지켰지. 첫째, 공기를 서두르고 건설단가는 최대한 낮춘다. 둘째, 부실공사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마지막은 기술인력 배양이었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 세 가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어.”

-후배 경영인들에 한 말씀 하신다면.

“93년 포철을 떠나면서 ‘하루빨리 광산을 사라’고 했어. 사실 철강사업은 좋은 철광석과 유연탄을 얼마나 싸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거든.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었어.”

-공무원이나 공기업의 비효율성이 자주 지적되고 있는 요즘인데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 공무원들 중에서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 그래서 안타까울 때가 참 많아.”

심상복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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