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내가 겪은 한국戰-美참전용사데이비드 앱샤이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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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한국과 미국은 경이적이고 주목할만한 위업을 달성했다.양국은 힘을 합쳐 공산주의 침투를 막았으며 미래 한국의 경제기적을 위한 초석(礎石)을 다졌다.양국의 승리는냉전에서 자유세계가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미국은 다음달 27일 워싱턴에서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공원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기념공원은 미국인들이 한국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다.지금 이 순간 한국전이 어떤 경로를 밟았으며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또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깊은 일이다.
한국전은 나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나는 한국전 초기에 포병소대를 지휘했으며 후에는 포병 중대장으로 참전했다.나는첫 임무로 북한군.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던 한 계곡을 야간 정찰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대낮처럼 변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군인들의 헌신적인 희생을 직접 목격했다.그리고 동시에 한국군 병사들의 용기와 힘에 경탄했다.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퇴임 연설에서 『한국인들의 당당함과 용기는 형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양국이 함께 참전했던 또 다른 전쟁인 베트남전에 대한 새로운논쟁이 시작되고 있는 요즘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공원 제막식이 열린다는 사실은 아이로니컬하다.베트남전 회고록을 펴낸 前 美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전쟁에 대한 미국의 무능 과 미숙을 지적했다. 그는 베트남전은 미국이 개입하지 말아야 했다고 지적하고 베트남전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한국전에 그러한 미숙이나 명분 부족은 해당되지 않는다.한국전 당시 미국은 「화려한」지도자들과 전략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당시 해리 트루먼.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매슈 리지웨이 사령관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보유한 인물들이 있었다.
북한이 남침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美의회가 승인하기도 전에 미군이 한국에 파견될 것이란 점을 단호히 밝혔다.
그러나 신념으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전쟁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인기가 급격히 하락,결국 그는차기 대통령선거출마를 포기해야 했다.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를 워싱턴이나 링컨에 버금가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생 각한다.
맥아더 원수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이 일본 일부를점령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미국내 일부주장에 대해 반대,민주국가로서 일본의 행로를 열었다.
또 인천상륙작전은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를 배경으로,맥아더 원수 휘하 참모 대부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행됐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선이 혼란에 빠져들자 맥아더 장군은 2차대전 영웅 리지웨이장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56세였던 리지웨이 장군은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던 한국군과 미군,그리고 유엔군을 구원하고 전선의 최전방을 강화했다.
그는 유엔군을 최정예 병력으로 재조직하고 중공군에 일대 반격을가해 서울을 재탈환했다.
트루먼 대통령에 이어 등장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현실적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분쟁을 가능한 빠르게,그러나 명예롭게 종식시키고자 했으며 한국재건에 관심을 쏟았다.동시에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전쟁을 「한국화」했다.
이런 뛰어난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이나 한국 모두 후일의 베트남전 처럼 반전(反戰)무드에 휩싸이지 않았다.한국전이 많은미국인들을 지치게 했지만 미군이 참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으며,돌아오는 병사들은 영 웅으로 환영받았다. 지도자들의 강력하고 굳건한 리더십은 북한으로 귀환을 거부한 공산군 포로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분명히 발휘됐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포로가 북한으로 강제 송환돼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있어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선 이견(異見)을 보였다.
포로귀환을 둘러싼 협상이 16개월 동안 진행되는 가운데 20만명 이상의 유엔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52년 4월,당시 13만2천명의 북한 포로 가운데 북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포로는 7만명에 불과했다.우리는 이들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1년 넘게 싸웠다.
한국전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한국전에서 미국.한국,그리고 동맹군이 보여줬던 결의와 힘이 냉전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했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전쟁만 하더라도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단순한 정치적 연합 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은 냉전이 얼마나 빨리 열전(熱戰)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이에따라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NATO를진정한 동맹체제로 변모시켰다.
또 한국전쟁은 미군의 한반도 철수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알게 해주었고 그후 오늘날까지 지역안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군주둔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의 대의는 옳았으며 지도자들은 용기와 분별력을 지녔고 전략은 굳건하고 뚜렷했다.그리고 우리의 승리-53년 종전(終戰)과 함께 부분적으로 이뤄졌으며,88년 한국의 민주화로 확장됐고,89년 냉전 종식과 함께 결실을 거둔-는 두개의 한국이 하나가 되고 또 자유롭게 변모할 때 완성될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재연구는 베트남전에 대한 맥나마라와 다른 관점을 부각시켜줄 수 있다.맥나마라 자서전은 지적하지 못했지만 비록 베트남이 공산화됐지만 베트남전은 동남아에서 더이상의 공산혁명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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