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아이스크림 황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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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이스크림 황제' - 월리스 스티븐즈(1879~1955)

큰 여송연 마는 사람을 불러라,
근육이 씩씩한 자를, 그리하여 그에게 일러
부엌의 컵에 식욕 돋구는 응유를 거품 일게 하라.
하녀들에게 보통 때 옷을 입고
빈둥거리게 하라, 그리고 소년들에게는
지난 달 신문지에 꽃을 싸 가지고 오게 하라.
실재를 현상의 궁극이 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이다.

유리 손잡이가 세 개 떨어진,
송판 장롱에서 그녀가 전에 공작 비둘기를 수놓은
시트를 끄집어내서
그 시트를 펼쳐 그녀의 얼굴을 덮어라.
만일 그녀의 굳은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녀가 싸늘하고, 말이 끊어졌음을 보여 줄 것이다.
램프로 하여금 불빛을 비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이다.


덧없이 녹아 사라지는 가장 사소한 일상이 당신의 실재라네. 공작비둘기를 수놓은 시트로 얼굴을 가린 시신 밑에 맨발이 삐죽 삐져나와 있듯, 지난 달의 신문지에 싼 꽃을 펼쳐보면 꽃속에서 죽은 벌이 바닥에 떨어진다. 상가에서 밤샘하는 사람들은 왜 이리 근엄한 얼굴인가.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神)은 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황제뿐인데.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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