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30.申惺模 전황보고서 이렇게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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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성모(申性模)전황보고서」는 50년7월1일부터 6일까지는 대전에서,10일부터는 대구에서 작성돼 부산에 있던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 시기는 미군의 개입과 유엔의 한국지원 결의라는 정치적.법률적 대응조치가 신속하고 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북한군에 밀리던 때로 가장 암울했던 기간이다.당시 통제조차 어려웠던 군의 후퇴와 전선상황의 혼미,열악한 통신수단등으로 申장관이 입수한 전황은 정확할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국방장관이자 전쟁지도 책임자로서의 보고서치고는 실망스러운 수준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7월5일자에서「2개사단(약2만명)을 청년방위대나 기타 애국청년단체에서 소집해 편성,훈련에 착수하기로…」(中央日報 22일字 14面 보도)라고 한 부분은 그 유명했던「국민방위군사건」의 불씨가 됐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군사침공으로 인해 국가가 와해되기 직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자원의 보존과 관리,동원.군사화라는 것은 상식이다.그러나 이는 무시한채 임시방편으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도 없이 전선에 마구잡이로 투입함으로써 수많은 청소년과 어린 학도 들을 희생시켰고 청소년들을 전장(戰場)에 버려두고 후퇴해 북한군의「전력보충용」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또 7월6일자의「…장제스(蔣介石)총통이 유엔과 맥아더사령관의허락을 맡아 중국군 포병 약2개대대를 보내…」라는 부분이다.대만정부가 한국전쟁 참전의사를 우리 정부에 보냈다는 사실이 문건으로 밝혀진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짤막한 蔣총통의 제안은 그들 자신이 직면하고 있던 고민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즉 대만으로서는 한국전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본토 회복의 야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대만에 대한 군사원조에 인색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美 7함대를 보내 대만해협을 봉쇄했다.이를 계기로미국의 대만정책은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게된다.
마지막으로 7월4일자「호주비행사의 오폭(誤爆)으로 부상한 白仁燁」(中央日報 22일字 14面 보도)을 언급하면서 괄호속에 옹진전투에서 해주까지갔던 연대장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옹진반도에서 선전한 17연대는 26일 오전까지 인천으 로 철수했으며 해주까지 올라간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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