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생활사이>통도사 是名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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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두고 우리 사회가 한차례 홍역을치르고 있다.종교가 인간구원의 과제를 안고 있는 한 이런 갈등은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게 된다.그러나 한가지 미봉책이 있다.그것은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길이다.우리 종교인 가운데그것이 포교나 선교의 수단이든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신앙의 참빛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그들의 삶을 통해 종교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본다.
[편집자註] 양산 통도사 시명스님은 그 생김새가 중국의 포대(布袋)화상을 닮았다.둥근 얼굴이나 앞뒤 불룩한 배가 영락없다.사람이 좋아 동네 꼬마들이 『뚱보 스님』이라 놀려도 역시 포대화상처럼 미소짓고 지나갈 그런 인상이다.
그러나 스님이 부르는 노래를 한번 듣기만 하면 그 「뚱뚱한 몸」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내로라하는성악가들은 한결같이 그와 비슷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테너 시명-.이젠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다.1년에 두차례 열리는 불교음악회나 일요일 저녁 btn32(불교TV)「우리들의 찬불가」에서 그를 쉽게 만날 수 있다.그는 『가고파』『청산에 살리라』등 가곡을 즐겨 연주하고 『구름의 노래』( 작사 작곡),신라향가 『원왕생가』(작곡),『성철스님 열반하시니』(작곡)등뛰어난 작품들을 우리에게 안기고 있다.
특히 그가 부르는 『청산에 살리라』를 듣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고 한다.분명 그런 점에서 그의 노래는 해질녘 산사(山寺)에서 은은히 퍼져나가는 범종의 소리와 같다.
출가한지 올해로 스물한 해.성악을 전공하던 그가 입산하게 된것도 인연이지만 다시 노래하게 된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혼인 7년이 지나도록 애기가 없던 그의 어머니가 불공끝에 얻은 아들이 스님이다.속가의 이같은 숙명이 그로하여금 20대 중반,늦깎이로 출가하게 만들었다.경봉스님(통도사 극락암 조실.1892~1982)을 친견했을 때,첫마디가 『전생에 중이었군.머리를깎아야겠어』였다.그래 당시 큰스님의 나이를 생각해 『군대 제대할 때까지 살아계시면 그러겠습니다 』고 했다.도망가고픈 그의 마음을 끝내 노장 스님은 놓아주지 않았다.제대후 경봉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시명이란 법명도 스님으로부터 받았다.세상 숱한 이름이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이름이다」(是名)고 했으니 그에 대한샤 기대를 알만하다.경봉스님 역시 일제하인1937년(그의 나이 46세)에 「34원 주고 축음기를 하나 샀다」고 일기에 남기고 있어 음악하는 제자를 기다리고 있은 셈이다. 지금은 「음악도 선(禪)의 하나」라고 인정하는 분위기지만 시명스님이 출가하던 70년대 중반만 해도 절집에서는 노래를들을 수 없었다.당연히 그도 음악과는 담을 쌓고 수행에 몰입했다.6,7년 지나도 별 발전(?)이 없었다.보따리를 싸 운수행각을 떠나던 중 마산결핵요양원에 있는 친구소식을 들었다.그를 만나러 요양원에 간 것이 다시 노래를 찾는 계기가 됐다.요양원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포교당을 맡아 환우들에게 불법을 전했다.환자들의 상한 마음을 달래는데는 말보 다 음악(=정서)이 더나을 듯했다.오르간을 준비해 솔밭에서 음악회를 열었다.잊혀졌던목청을 가다듬어 그들과 함께 노래했다.당연히 효과는 기대이상으로 나타났다.이후 그는 「노래하는 포교사」로 세종문화회관을 비롯,전국 유명무대를 누비 게 됐다.연주횟수도 1백회가 넘었고 사찰 합창단도 10여개나 지도했다.
『예술과 종교를 비교할 수는 없다.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은 다만 인간의 마음을 순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종교는 그 이상이다.지금껏 미안한 얘기지만 포교수단 이상으로 노래부른 적은 없다.앞으로 3,4년 더 노래하면 무대에서 떠 날 계획이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하려는 것은 순전히 나이 탓이다.
『늙은 중이 노래한다는 것은 포교에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그래도 그에겐 음악과의 질긴 인연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한국불교 음악의 문헌정리를 비롯해 작곡 등 할일이 많은 탓 이다.영축산 계곡의 맑은 물처럼 자신의 얘기를 수줍게 털어놓은 그는 말을 끝내고 설법전으로 향했다.7월2일 수원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위해 발성연습이라도 해야 한다며.
崔濚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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