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里 선생님 靈前에 부쳐..-문순태(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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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오늘 아침 안개 걷힌 무등산(無等山)을 바라보니 문득 선생님모습이 떠올랐습니다.선생님은 광주에 오실 때마다 무등산을 보면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진다고 하셨지요.언젠가는증심사에 가셨을 때 무등은 불교의 무유등등( 無有等等)에서 연유된 것이라면서 부처님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이 산의 정상에 한번 오르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6월의 무등산은 저렇게 야청(野靑)빛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청담동 선생님 뜨락의 대추나무 잎도 6월의 푸르름을한껏 자랑하는데 선생님은 기어코 이「푸른 이승」을 하직하시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떠나기가 싫으셨으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정신을 놓으시고「이승과 저승」의 어둡고 답답한 갈림길을 헤매이셨습니까.
술을 못마시는 제자들에게 두살 때부터 술을 마시고 뒷마루에서섬돌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늘 버릇처럼 자랑하시며 술을 권하던선생님.제자들과 어울려 대취하셔서도 머리칼 하나 흐트러짐 없이누가 몇잔을 마셨는지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시고 조용히 웃으시며 술잔을 내미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오늘 더욱 사무칩니다.광주에 오실 때마다 젊었을 적에 거닐었던 옛 골목을 꼭 다시 찾아가보며 먼저 세상을 떠난 김현승(金顯承)선생님을 그리워하시던 선생님,이제는 우리가 선생님을 그리 워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생전 굳이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으시려고 했지요.선생님은 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그 때문이었는지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우울과 슬픔과 주검의 폐허속에 젖어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언젠가 고향 경 주(慶州)를다녀오시더니『내 고향 고도 경주는 폐허였다.그것은 끝없는 슬픔이요,우울이요,주검이었다』고 탄식하시기도 했습니다.그리고 선생님은『이 슬픔과 우울과 주검의 리듬이 나의 전생과 연결돼 나로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고향과 타향에 비유하시며 죽음은 끝이 아님을 믿는다고 하셨던 선생님은 지금 잠시 고향에 다니러 가신 것입니까. 누가 뭐라해도 선생님은 오로지 올곧은 마음으로 80여년간한국 순수문학의 텃밭만을 일궈오셨습니다.선생님은 미학소설의 큰강물이셨습니다.비록 선생님이 이승을 떠나셨다해도 선생님이 남기신 분신같은 작품들이「東里의 江」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선생님은 신인간주의의 철저한 옹호자이셨습니다.선생님께서는 휴머니즘은 문학정신의 본령이며 소설은「인간 사랑학」이어야 한다고하셨지요.이 세상에서 어떤 이데올로기도 피와 우정과 사랑을 지배할 수 없다고 강변하셨지요.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가르침은 작은 것같으면서도 참으로 위대했습니다.소설가라면「이름모를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를「어떤 새가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소리로 울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고」「굴참나무와 졸참나무를 구별해 써야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소설가는 농사꾼이 농사를 짓듯 단 하루도 쉬어서는 안된다시며 육서를 두루 달통한 솜씨로 자강불식(自彊不息)이라는 글을 써주셨지요.지금 그 편액을 바라보면서치자꽃 향기같은 선생님의 그윽한 체취를 다시 느껴봅니다.그러나 선생님은 영원히 떠나셨습니다.80평생 큰 욕심으로 일궈놓으신 모든 것을 이승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참으로 떠나기 싫은 먼 길을 가셨습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은 고희기념시집의「귀거래행(歸去來行)」이라는 시에서『아아,이렇게 고향에 다 녀오듯 저승에서 이승으로돌아올 수 없을까』하고 노래하셨듯이 선생님은 다시 돌아와 언제까지나 이승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제 이 풍진 세상의 온갖 집착의 끈 모두 끊어버리시고 한마리 학처럼 운명의 찬란한 무지개 너머로 훌훌 나래를 펴소서.저 세상 가시거든 천지자연 모든 것을「님」이라 불렀던 무녀 모화도 만나보시고,머리 위에 조그만 향 로를 얹은 채 오뇌와 비원이 서린 자세로 앉아있던 등신불(等身佛)의 구원을 받으소서.『파란 솔등 돌아/노란 들녘 지나/하얀 모랫내 건너/들국화 헤치며 고향으로 간다』고 귀거래사에서 노래하셨던 것처럼 선생님은 다만 잠깐 고향에 가신 것 뿐입니다.부디 편안한마음으로 잘 다녀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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