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들으며생각하며>34.咸南북청출신 6.25피난민 安龍德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우리나라에 자랑스러운 고장은 많다.그 중에 함경남도 북청의 자랑거리는 독특하다.일제때부터 인구당 학생수와 학교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장이었다.북청의 학부형들 가운데는 자식을 서울상급학교에 유학시키려고 함께 서울로 와서 그 학 자금 뒷바라지를 위해 물지게꾼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그래서「북청물장수」라는 낱말이 생겨났다.북청사자놀이도 이 고장의 자랑거리다.북한이 요즘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후보지로 잡았다는 신포(新浦)도북청군에 속한다.명태가 많이 잡히 기로 유명한 세계적 어장이다. 6.25피난민 안용덕(安龍德.71.乙丑生)씨는 북청 사람이다.그는 지금 인천에서 산다.한국견지낚시클럽 원로회의 의장이라는 직함에 맞게 그는 지금도 낚시인생을 산다.컴퓨터에 관련된 영세 기업을 하는 둘째 아들 가게일을 가끔 거드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도 없다.그는 오랫동안 북청읍민회장일을 맡아 했고 어려운 고향사람을 돕는 일과 북청장학회 일에 앞장서온 것으로 유명하다.
『저는 18세에 북청공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건축토목이 전공이었어요.마침 국민학교 교사가 모자란다면서 졸업반때 담임 선생이권하길래 3종 교원시험에 합격해 풍산문기국민학교 선생으로 부임했지요.그 학교 학부형 하나가 일본의 큰 건설회사 인 하사마구미(間組)의 장진 공사장 현장 책임자로 있었습니다.그 사람이 국민학교 선생보다는 이왕 건축을 전공했으니 자기와 함께 건축 일을 하자는 것이었어요.그래서 장진으로 갔습니다.』 그의 모험과 방랑이 반드시 6.25이후에 생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국민학교 선생을 2년만에 그만두고 건축기사가 된 것도 하나의 방랑일 것이다.국민학교 선생의 한달 수입은 봉급 30원에 전시금전수당 12원,합계 42원이었다.건설회 사로 가니까 이보다 약세배인 1백20원을 주었다.
『총각숙소에는 한방에 두사람씩 기거했습니다.제가 처음 갔을때그 방을 쓰는 사람은 일을 나가고 없없는데 벽에 기타 한대가 기대 있었습니다.나중에 만나고 보니 그 주인은 그 후 유명한 희극배우가 된 김희갑(金喜甲)이었습니다.희갑이는 청진 사람인데나보다 나이가 한살 위였고,누님 한분밖에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고아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지요.상업학교를 중퇴하고 그 건설회사에와서 자재계를 맡고 있었는데 일이 야무지고 유능해서 일본 사람상사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었 어요.희갑이한테서 저 그때 노래많이 배웠어요.콩쿠르에 나가서 그 사람이 1등하고 제가 2등한적도 몇번 있었고.이 이남 땅에 온다음 그 사람이 제게는 가장친한 친굽니다.』 해방이 되고 그 일본 건설회사가 떠난 다음 김희갑씨는 남아 있던 자재를 팔아 돈을 한가방 챙겨서 이남으로갔다.안용덕씨는 고향 북청으로 다시 돌아왔다.안용덕씨의 집은 그때 북청서 제일 컸던 안성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집에는 트럭이 두대 있었다.11남매의 넷째였던 그는 이 트럭 두대를 맡아굴리는 장사를 시작했다.
『스물두살 되던 해 트럭에 짐을 싣고 혜산진으로 갔습니다.마침 그때 싣고 갔던 물건을 산 사람이 저를 좋게 보았던지 자기딸을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함남고녀를 졸업하고 도립병원에 근무하는 간호부였습니다.산파면허도 땄다고 했어 요.겨울이었는데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첫눈에 천사같아 보였습니다.
』 그러나 집에 가서 어른들한테 결혼 승낙을 얻어내는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북청 사람들은 풍산.삼수.갑산.혜산진을 통틀어 삼수갑산이라 부르며 업신여겼다.거기는 수말이 새끼를 낳는 곳이라고도 했다.그로부터 3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 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안용덕씨는 이 3년의 약혼기간을 여름이면 서너달씩 혜산진에 와서 보냈다.장인될 양반은 압록강에 나가 열목어 낚시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압록강 열목어 낚시는 2인1조가 돼야 합니다.혜산진의 압록강물은 너무 너무 맑았지요.제 장인은 낚시에 달인이었어요.한 사람은 강 바닥을 눈가래 같은 것으로 긁습니다.그러면 강바닥에있던 돌이 넘어지면서 그 밑에 붙어 있던 청벅이 라는 벌레가 강물에 떠내려가게 됩니다.이것을 먹으려고 열목어가 모입니다.압록강물은 독특한 점이 있어요.강바닥을 긁어 생긴 흙탕물이 한 오리쯤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길다란 띠를 만들며 흐르지요.
낚싯바늘을 살 수 없던 때여서 바느질 바늘을 불에 구워 구부려 썼지요.줄은 명주실을 꼬아서 썼고,미끼는 청벅이를 잡아서 바늘 끝에 달았지요.장인은 한참 낚시질을 하다가 저에게 낚싯대를 넘겨주고 자기는 가래질을 했어요.압록강 열목어 는 크기가 요새 시장에 나는 고등어만 했지요.가장 많이 잡았던 것으로는 장인과 둘이서 88마리를 하루에 잡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나는 이 대목을 들으면서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이 압록강으로 옮겨져 장인될 사람과 그의 젊은 사윗감,이 두 한국인사이에 여름 햇살을 가득받은 원경(遠景)이 되어 스크린을 고요히 덮으며 흐름을 느꼈다.
50년 봄에 안용덕씨는 긴 약혼기간을 끝내고 결혼식을 올렸다.이들의 행복은 오래 갈 수 없었다.결혼식을 올린지 석달만에 6.25가 터지고 안용덕씨는 당장「인민군입대청원서」를 써야 했다.그날로 군대에 뽑혀 갔다.수송 도중 그는 탈주 해 장인의 주선으로 혜산진 근처에 있는 삼수갑산 첩첩산중에 숨었다.거기는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오고,밀경자들이 숨어서 아편 농사를 지어도그 지독한 이북 공산정권의 내무서원도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가을이 되고 그 곳에 미국 3사단 기갑연대가 진군해왔다.안용덕씨는 자기의 은신처 부근으로 통신시설을 부설하던 미군에게 발견돼 그들과 함께 혜산진으로 돌아왔다.
『미군 뒤를 따라 국군 3사단 26연대가 혜산진에 들어왔습니다.그들에게 소를 잡아 고기 대주는 것등이 제가 맡은 일이었습니다.통금시간은 오후 5시였어요.혜산진에서는 압록강 건너 바로앞이 중국 땅입니다.중공군이 새까맣게 집결하고 있 는 것이 그대로 보였습니다.그 사이에 친해진 국군 장교 한 사람이 저보고『安과장,3차대전이 붙었다.미군은 중국과 소련에 원자탄을 때리게 된다고 한다.빨리 피하라』고 했습니다.저는 재빨리 인민군이쓰던 트럭을 한대 몰고 「이북사람」 (그는 북에 남겨두고 온 첫부인을 이렇게 부른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그러나 그 차는 1백m도 못가 서고 겨우 고쳐 놓으면 또 1백m도 못가서 섰습니다.휘발유 관이 고장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차와,몸이 무거워 먼길을 걸을 수는 아무래도 없던 자기의 새 색시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혼자서 5백50리 길을 뛰다시피 걸어 나흘만에 북청으로 왔다.그의 아버지는『우리 집은 이 사변통에도 조상의 음덕 탓인지 아무일 없다 .너만은 국군쪽에서 일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거라』고 말했다.안용덕씨는 신창리 부두에서 다투어 남쪽으로 가려고 나온 여러 사람들과 목선을 탔다.
***“慘狀 영화화 되길” 『제 바로 밑의 동생은 화가였습니다.금강산휴게소 미술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배가 떠나려던 때 부두에 나타났습니다.그 배를 타려고 그애도 매달렸습니다만 워낙 사람들이 빽빽하게 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다른 사람처럼 바다로 떠밀려 떨어졌습니다.12월의 매서운 추위속에 그애는 함빡 젖은 몸으로 부두에서 떨면서 배가 떠나는 것을 지켜 보다가 돌아섰습니다.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동생한테 그 일로 용서 한번 빌지 못하는 것이 제 평생의 한이에요.
』 안용덕씨는 주문진까지 와서 그 배에서 내렸다.원산 부근을 지나올 때 바다에는 부서진 배조각,이불과 옷,거기다 수많은 시체들까지 너부러히 떠다니고 있었다고 한다.그 해역은 금강산에서부는 바람과 함경도에서 부는 바람이 맞부딪쳐서 파 도가 매우 높았다.그 비참한 광경이 영화로 재현되기를 그는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우리나라 국민이라면 6.25의 이 장면을 알아야 하고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주문진에서 포항,포항에서 여수,여수에서 부산으로 옮겨 다녔습니다.부두 노동을 하며 살았어요.저는 이북에서는 형제도 많고,성질이 온순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혈혈단신 혼자가 되니까 사람이 달라집디다.성질이 거칠게 변해요.이 외로운 인생을 살아서 뭘 하느냐는 절망 속에 빠져 있다가,금방 다시 이를 깨물고라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솟아 났다가 하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내 뒤에는 이제 그림자 하나밖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습니다.남한테 맞고 다니고 싶 지 않았습니다.저도 주먹을 휘둘러 맞받았지요.』 그는 주먹이 없으면 들어가서 일을 할수 없는 부산「영도입석부두」의 하역 노동자가 되었다.그곳은 미군 레이션 박스를 하역 보관하는 장소였다.어느날 밤 그는 여러명의 상대에게 걸려서 너무도 많이 얻어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그때 치아를 모두 잃고 그후 쭉 틀니를 끼고 살아왔다.철조망을 끊고 미군창고 물건 세 트럭분을 털어 반의 반값에 국제시장에 내다 팔고는 9명의「함경도 동생」들과 똑같이 28만원씩나누어 가진후 부두노동판을 떠났다.계속 그 판에 남아 있 다가는 자신도,그「동생」들도 감옥밖에는 갈데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가 내렸던 결정이었다고 한다.
***漢江서 낚시 40년 그후 서울로 올라와 금호동에 자리를잡고 면장갑.면양말 짜는 사업을 시작했다.그때 한강엘 나갔다가견지낚시하는 한 노인을 알게 되어 그에게서 견지낚시를 배웠다.
그후 40여년간을 압록강 아닌 한강 줄기의 상하류와 한탄강을 오르내리며 그는 낚시를 해오고 있다.그가 재혼을 한것은 37세때인 61년이었다.지금 부인과의 사이에 3형제를 두었다.차례로여러가지 사업에 손을 대었다.마지막으로 인천 동화목재단지에서 안일기업(주)이라는 제재소를 운영했으나 이것을 인계받아 하던 큰 아들이 작년 11월 부도를 내는 바람에 공장과 사업이 모두남의 손으로 떠내려갔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용덕이라는 이름은 실은 내 이북사람의이름입니다.이남 와서 호적을 만들면서 그렇게 바꿨어요.그 사람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낚시를 하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물속의 어디서 놀고 있 을 고기를 기다리게 됩니다.낚아채야 할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6.
25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공간과 시간을 조각조각 잘라버렸다.한국인은 모두 가볍건,심하건 이로 인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다.안용덕씨에게 낚시는 보이지 않는 것의 수면 위로 나타남을 위한 기다림인 동시에 수면위에 보이는 것 의 흘러가 사라짐을 위한 기다림이기도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