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인종 문제 제기한 오바마의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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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인종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미국 사회에서 정치인이 민감한 인종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금기(禁忌)로 돼 있다. 제 발등을 찍는 바보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뿌리깊은 인종 갈등과 편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통합과 화합을 통한 치유를 역설하는 쪽을 택했다.

오바마는 그제 미국의 건국 성지(聖地)인 필라델피아의 헌법기념관에서 “221년 전 채택된 합중국 헌법은 정의·자유·단결을 약속하고 있지만 노예제라는 원죄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다”는 문제 제기로 40분간의 연설을 시작했다. “원죄에 대한 해답은 양피지 위의 글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도 했다. 자신의 태생을 언급하며 흑인과 백인 사이에 실재하는 편견과 서로에 대한 불만도 있는 그대로 밝혔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9·11 테러는 국가 테러를 지원한 미국에 대한 보복” “갓 블레스 아메리카(미국을 축복하소서)가 아니라 갓뎀 아메리카(빌어먹을 미국)”라고 말한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궁지에 몰린 오바마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파문을 진화해야 했다. 그는 회피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택했다. 라이트 목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도 “나의 백인 할머니와 의절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의절할 수 없다”며 그를 인간적으로 감쌌다. 동시에 “그의 발언은 미국이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인종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낸 것”이라며 “인종 문제도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야 할 미국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낡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표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인종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그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미 유권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이런 용기를 가진 정치인이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희망이다.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감동을 기대한다. 금기와 성역에 과감히 맞서고, 진심이 담긴 언어로 꿈과 희망을 말할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감동은커녕 추한 표 계산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