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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彈劾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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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 탄핵이 논란이 되는 것은 그 사유 때문이다. 대통령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그 죄가 탄핵할 만큼 큰가 하는 문제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한 르윈스키 스캔들이 진행될 때 클린턴을 도덕적으로 옹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민주당조차 그의 부도덕성을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게 대통령을 파면할 사유가 되느냐 하는 게 클린턴 탄핵의 쟁점이었다. 쟁점이 되는 순간 상황은 정치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출발은 도덕적.법적인 문제였으나 과정은 정치적이었다.

도덕적.법적 문제가 명백해 정파나 세력 간 쟁점이 없었던 닉슨의 경우와는 달랐다.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막바지엔 백악관 비서들까지 닉슨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닉슨은 탄핵이 발의되기 전 사임했다.

하원이 탄핵안을 가결했던 1998년 말, 클린턴의 민주당은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는 공화당의 쿠데타"라고 탄핵의 정파성을 주장했다. 백악관은 "탄핵 사유는 헌법이 규정하는 중범죄와 비행의 기준에 미달한다"고 사유의 부적절성을 강조했다. 민심도 갈렸다. 클린턴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율은 동정론을 업고 60%까지 올라갔다. 결국 상원은 이듬해 1월 탄핵심판에서 클린턴을 살려줬다.

공화당이 치른 대가는 컸다. 르윈스키 문제를 최대 이슈로 부각시켜 치렀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대패했다. 4년간 강경노선으로 공화당을 이끌었던 국민적 지도자,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은 하루아침에 정계를 떠나야 했다. 무엇보다 탄핵안 가결 뒤 공화당의 지지율은 14년 만에 최악의 수준인 40%로 떨어졌다. 사실 탄핵의 최대 피해자는 '대통령직'그 자체였다. 국가원수이자 군 최고사령관이며 헌법의 수호자인 미국 대통령직의 권위와 존엄은 땅에 떨어졌다. 국회의 정파성은 조롱거리가 됐다. 탄핵의견을 내놓은 특별검사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됨으로써 사법제도에 대한 회의도 퍼져나갔다. 3권 분립의 세 기둥인 헌법기관들이 모두 패배했다.

전 국민이 클린턴으로 상징되는 60년대 반전(反戰)세대와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전후(戰後)세대로 찢겨 문화전쟁을 치른 상처는 깊고 오래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도에선 닉슨과 닮았지만 탄핵 논란은 클린턴과 비슷한 데가 많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