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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레터] 어린이문학이 설 땅 잃어가는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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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아동문학가로, 우리글 연구가로 한평생을 보낸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유고 평론집(『어린이를 살리는 문학』, 청년사)이 나왔습니다.

선생의 글 속에는 우리 어린이 문학의 척박한 현실이 절절히 드러납니다. 이른바 ‘명랑동화’가 인기를 누렸던 1980년대. 선생은 이를 두고 “천박한 상품”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시험점수 쟁탈의 비인간 교육을 받아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아이들은 그저 뜻없이 웃기는 오락물만을 찾아 즐기게 돼 있다”며 “명랑물들은 이런 아이들의 마음에 잘도 맞추어 저질의 웃음을 파는 상품으로 만들어졌다”는 선생의 목소리에선 분노의 기운마저 느껴집니다. 선생은 명랑동화 열풍의 또다른 배경으로 ‘상업주의’를 짚어냅니다. “어차피 자본의 세상이니 실속이나 챙기자는 상업주의는 자유당과 공화당 때는 반공동화로 한몫을 보더니, 그 뒤로는 명랑동화·명랑소설로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시류에 편승한 ‘반짝 기획물’에 대한 비판은 그 뒤로도 계속됩니다. 90년대 새로 등장한 ‘철학동화’를 놓고도 선생은 “상업주의의 한 흐름”이라며 “동화에 본래부터 철학이 있는 것인데 철학이란 말을 붙여야 할 까닭이 없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만드는 출판인들이 모두 아이들을 돈벌이의 상대로만 생각하니, 어린이 문학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며 안타까와했습니다.

야속하게도 어린이 문학의 형편은 아직까지도 그닥 나아지지 않은 듯합니다. 80년대 명랑동화의 자리를 ‘자기계발서’가 대신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삶의 덕목을 직접 씹어 먹여주겠다는 부모의 조바심과 상업 출판사들의 계산이 발맞춘 결과겠지요. 교보문고에서 집계한 이번 주 ‘아동’분야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어린이를 위한 끈기』『리더: 성공한 위인들의 리더 방법』『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등이 순서대로 1∼4위를 차지했더군요. 또 5위인 독일 동화 『책 먹는 여우』가 그나마 문학 작품의 체면을 세워줬을 뿐, 6∼8위 자리에도 『어린이를 위한 경제 습관』『어린이를 위한 청소부 밥』『어린이를 위한 배려』등 자기계발서가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생전의 이오덕 선생은 “어린아이들은 감성으로 자란다”며 “지식이나 사상을 주기보다 구체적인 삶을 보여줘 그것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관념이나 이론은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노래와 이야기와 그림을 줘야 한다”는 선생의 충고가 새삼 귀에 쟁쟁합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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