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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부가 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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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모닝콜=오전 6시. 남편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그 후 하루종일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전화 연락을 극도로 삼간다. 굳이 전할 말이 있으면 e-메일을 이용한다. 서로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남편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만해마을에서 방 한 칸을 신세지며 몇 달째 머물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모닝콜 이후 남편의 글쓰기가 시작되면 서울에 머무르는 아내는 꼼짝하지 않고 수도승처럼 그림만 그린다. 선의의 경쟁을 하듯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에 몰두한다. 이것이 이 부부의 요즈음 사는 모습이다.

#전시회=글 쓰는 동안 남편은 가급적 서울 나들이를 자제했다. 불가피한 일 때문에 올라왔다가도 이내 총총걸음으로 다시 내려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난달 아내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을 때만큼은 만사 제쳐놓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아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전시회를 찾아준 손님들을 맞고 아내의 작품들을 대신 설명하기에 바빴다. 남편은 이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든 아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태세다. 그런 남편을 아내는 그저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첫 만남=남편과 아내는 숙명여중·고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처음 만났다. 남편은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음악선생이었고, 아내는 학생들이 존경하며 따르는 국어선생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보다 네 살 연하다. 남편은 쥐띠로 올해 72세고 아내는 원숭이띠로 76세다. 하지만 함께 늙어가는 마당에 그깟 나이 차가 무슨 대수랴.

#결혼=음악선생은 총각이었고, 국어선생은 어린 아들이 딸린 미망인이었다. 45년 전 총각이 아이 딸린 연상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국 연하의 음악선생은 집안의 반대와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 딸린 연상의 국어선생과 전격적으로 결혼했다. 힐난, 질시, 감탄, 축복이 뒤범벅된 채 말이다.

#자녀=두 사람은 결혼해서 모두 네 자녀를 뒀다. 첫째는 아내가 데리고 온 자식이었고, 아래 셋은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자식이었다. 모두 훌륭히 성장했다. 첫째는 서울 모대학 교수, 둘째인 딸은 미국 매사추세츠대학 미술학과 비주얼디자인 교수, 셋째인 아들은 오하이오주립대 철학과 교수, 그리고 막내 아들은 와튼스쿨에서 MBA를 한 후 시카고에서 IT관련 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다.

#고백=남편과 아내는 자식 농사에서 성공했다. 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이가 몇이냐?”고 물어오면 본의 아니게 ‘셋’이라고 말했던 것을 첫째 아이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해 왔다. 이제는 셋을 ‘넷’이라고 분명하게 고쳐 말하고 싶다는 이 부부의 잔잔한 고백처럼 모든 삶에는 사연이 있고 그것은 고백될 때 되레 아름다워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우산=“우리는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의 우산이 되어줄 터이니.” 언젠가 인디언들의 글 모음에서 읽은 구절이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서로의 우산이 되어주는 일이다. 서로에게 우산이 되어준 남편 이름은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낸 피아니스트, 음악학 교수, 교육행정가다. 아내 이름은 문희자. 시인이자 화가다. 이들이 함께 받쳐든 낡은 우산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하세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해라.” 어린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하렴.” 그렇다. 사랑이다. 사랑하자. 더 많이. 결국 삶은 사랑할수록 보석인 것을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더구나 나이 들어 함께 늙어가며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다. 아니 위대하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