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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22<스티코프비망록>5.4者회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47년1월 초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을 앞두고 김일성(金日成)이 치스차코프대장,로마넨코소장과 함께 연해주의 보로쉬로프로 스티코프를 방문해 북한의 정치.경제 전반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밝혀졌다.이러한 사실은 스티코프가 자신의『비망록』 에「4者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 둠으로써 드러났다.
북한의 김일성이 49년3월 정권수립후 소련을 공식방문하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소련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돼 왔으나 자료로 입증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47년1월3일부터 6일까지 계속된「4자회담」은 ▲북한정권 창출의 소련측 주역인 스티코프.치스차코프.로마넨코와 김일성이 만나 당면과제에 대해 깊숙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 ▲47년 2월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과 본격적인「사회주의 개혁」 추진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열렸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망록』에는 주로 김일성이 요구하거나 제안한 내용이 자세히기록돼 있고,이에 대한 스티코프의 대답이나 지시사항은 소략하다.이때 논의된 내용은 크게 4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재정지원문제다.김일성은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6억원의 추가 재정지원과 일용필수품.군수품등의 지원을 요구하고있다. 둘째는 북조선 도.시.군인민위원회 대회 소집문제다.북한은 46년7월22일 북한지역의 각 단체.정당들을 망라해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8월말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 신민당을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한후 이를 기반으로 제일 먼저 인민위원회선거를 계획했다.이에 따라 9월5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2차 확대위원회는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그해 11월 북한은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정권창출의 순서를 차례로 밟아나갔다.인민위원회 선거가 끝나자 북한은 북조선 전체를 망라한 인민회의를 소집,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임시」를 떼고 정식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바꾸는 절차에 착수했다. 「4자회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비망록』에 따르면 북조선 도.시.군인민위원회대회 소집과 일정,대회 보고자와 보고내용에 대한 결정이 여기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47년2월초 열린 북로당 정치위원회,조직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 대회 소집문제를 토론했으며 이 자리에서 도.시.군인민위원회 대회를 2월17일에 열기로 결정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셋째는 인민경제발전계획 작성문제다.남쪽지역이 9월총파업과 10월폭동에 휩싸여 경제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을 시점에 북한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토지개혁.노동법개정등을 마무리하고 경제계획 수립을 본격 추진하고 있었다.그러나 김일 성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북한은 국가계획을 수립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고,이것의 해결을 위해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서인『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47년 인민경제계획을 작성하고 47년2월19일에 열린 북조선 도.시.군인민위원회대회에서 발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비망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인민경제계획 작성과 정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소련과 논의했다.사실상「4자회담」에서 경제계획의 윤곽이 확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는 박헌영(朴憲永.남조선노동당부위원장)의 합법화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 지도부 창설문제다.「4자회담」에서 스티코프는 박헌영을 합법화시키는 문제를 제기했다.이것은 박헌영이 월북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를 북쪽에서 활동하게끔 하자는 의도였다.이렇게 될 경우 박헌영은 남쪽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이에 대해 김일성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이것은 박헌영이 계속 남로당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남쪽「혁명운동」에만 전력하도록 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보여주 는 것이다.
또「4자회담」에서는 남로당과 북로당의 단일 지도부 구성문제가다시 논의됐고,구체적으로 지도자문제까지 논의된 것으로 확인된다.그러나 이 문제는 여러 계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최종 결정을내리지 못하고 유보됐음을 알 수 있다.이 문제 는 49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김일성이 당위원장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같이「4자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은 47년 북한정치.
경제상황뿐만아니라 이후 남북노동당간의 현안으로 등장한 통합지도부문제까지 광범위한 것으로 이 시기 소련과 북한관계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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