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빛 음악으로 그린 ‘판타지 앙상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휘자 켄트 나가노와 몬트리올 심포니가 8일 뉴욕에서 진은숙 씨의 ‘로카나’를 연주했다. ‘로카나’는 진씨가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세계 무대에 소개한 첫 후속 작품이다.

관람객 발걸음에 맞춰 전시장 바닥이 일렁인다. 이 물결은 현란한 영상으로 벽면 가득 비춰진다. 관람객은 그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에 눈길을 빼앗겼다. 사고가 정지하고 감성만이 지배하는 세계다. 지난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설치미술 작가 울라프 엘리아손의 작품을 그렇게 만났었다.

그리고 막바지 겨울 한기를 머금은 비바람이 몰아치던 8일(현지시간), 뉴욕 카네기홀에서 진은숙(사진)이 음악으로 그려낸 그림, ‘로카나’를 만날 수 있었다. 3일 몬트리올 세계 초연 이후 두 번째 연주다. 엘리아손에게서 영감을 얻은 ‘로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빛의 방’을 의미한다. 진은숙의 음악은 엘리아손의 작품 속에 담긴 빛과 이미지에 동적인 에너지를 추가한 듯 했다.

몬트리올 심포니 상임지휘자 켄트 나가노는 연주 전 작곡가 진은숙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음악에 담긴 빛과 공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기상악화로 오하이오발 비행기가 지연돼 안타깝게도 작곡가가 연주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연주가 시작됐다. 봄 하늘을 가득 채우고 쏟아져 내리는 수만 개의 벚꽃처럼 현악기의 소리가 흩어졌다. 금관악기의 울림은 정적을 끊으며 여기저기서 도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피아니시모에서 시작해 서서히 커져가던 현악 소리가 갑작스레 증발하고 다시 물결이 살랑대듯 퍼져가는 가운데 경쟁하듯 나서는 타악기와 금관악기들. 긴장과 불안, 공포의 무드가 조금씩 고조됐다.

카네기홀에는 저명 오케스트라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공연을 열고 있다. 우리가 보통 현대음악이라고 말하는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도 하나씩 포함돼 있다. 현대음악에 그리 생소하지 않은 사람들이 뉴욕의 청중이다. ‘로카나’에서 쏟아져 나오던 현악과 타악의 앙상블은 그런 뉴욕 관객들에게 낯설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회화적 음악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함께 작품을 감상한 한 작곡가는 “진은숙이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고 평했다. 반면 카네기홀의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매번 참석한다는 칼 에반스 부부는 “시끄러움과 고요함이 아름답게 조화돼 놀랐다”며 진은숙의 다른 곡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로카나’가 한국에서 연주될 때 놓치지 마시기를.

용호성(컬럼비아대학교 객원연구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