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러시아의 동해 상공 무력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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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러시아 정찰기 한 대가 그제 동해 상공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해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참가 중인 미 항모(航母) 니미츠호를 정찰하다 양국 공군의 긴급 대응기동으로 물러났다. 정찰기는 니미츠호 주변을 20여 분간 비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방공식별구역은 한반도 주변에서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미 태평양 공군사령부가 1951년 설정한 공역(空域)이다. 비록 영공(領空)은 아니지만 엄연히 한국 국방부의 통제를 받는 구역이다. 외국 항공기가 진입하려면 24시간 전에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이를 무시하고 방공식별구역을 무단 침입해 니미츠호에 대한 정찰을 시도한 것은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다. 단순한 정찰 차원을 넘어 한·미 양국의 대응 태세를 떠보면서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군사력의 존재를 시위하려는 의도가 크다고 본다.

이번 사건은 최근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막대한 오일 머니 수입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며 미국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다. ‘신(新)냉전’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전통적 ‘남진(南進)정책’의 대상 중 하나인 동아시아에서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에서 태평양 공해까지를 작전 반경으로 하는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또 지난달에는 전폭기가 일본 영공을 침범해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정부는 이번 일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영공을 침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제법 위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에 대한 경각심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감을 표시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미국과 러시아의 고래싸움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 또한 안이한 생각이다. 한국과 미국은 엄연한 동맹국이다. 러시아와 협력하면서도 군사적 동향과 의도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