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보수와 진보, 서로를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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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계사적으로 보면 지금 한국에서는 때 아닌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벌써 1960년대 초부터 대니엘 벨 같은 서방선진국 지성인들은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을 선언했고 80년대 말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 지성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식'을 선언해 세계 지식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일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 이데올로기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 공존하며 경쟁 해본 경험 없어

이데올로기는 국민을 좌파와 우파로 갈라놓는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진리와 정의의 독점을 주장한다. 상대방은 진리와 정의의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타도와 숙청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불법 선거자금 문제로 거의 완전히 기능마비 상태에 놓여 있지만 검은돈 문제의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구조다.

그러면 한국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역사의 시간에 역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왜 뒤늦게 이데올로기의 꽃이 피고 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한국 사회는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트로머(trauma)의 결과로 좌파세력은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파가 지배하는 구조로 돼 있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사회변화를 겪어왔고 최근엔 민주화와 더불어 좌파세력도 수면 위로 부상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좌익의 부상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상화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선 한국의 보수세력은 좌파와 공존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다. 우파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우파는 좌파와 경쟁하는 경험도 능력도 없고, 자칫하면 우파가 권력을 독점했던 과거에 대해 향수를 느끼면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는 공포심과 패배의식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좌파세력도 우파와의 공존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경쟁 경험도 없다. 그 대신 투쟁과 타도만이 있을 뿐이다. 좌파세력에 우파세력은 대화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다.

과거 우파세력의 권력독점 시대에 좌파세력이 혁명적 도전에 집중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우파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로 환원하는 것도 아니고 좌파가 꿈꾸는 혁명이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좌파와 우파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 이념의 내용에서도 좌익과 우익은 서로 상대방의 이념에서 배워야 한다. 보수주의는 사회변화와 더불어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변화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진보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추구하는 노력이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더욱 불완전한 결과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비극적인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조심성'을 배워야 한다.

*** 우파 독점도 좌파 '혁명'도 안돼

인간은 존재하는 세계에 애착을 느끼게 마련이고 변화를 꿈꾸면서도 지켜야 할 가치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보수주의의 참뜻이다. 진보도 원래는 좀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소박한 인간의 소망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유럽이 '발전(progress)'의 신화를 신봉하게 되면서 변화를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도 좋다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변한다. 그러나 물론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절대 진리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의 성향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불 수 있다. 좌익이나 우익 모두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하루속히 해방돼야 한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보수와 진보의 중간지대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경원 사회과학원장.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