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 퇴진 이후 쿠바는 … 특파원 5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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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간 쿠바를 통치해 온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후임으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이 선출됐다. 형에 이어 동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쿠바 의회는 24일(현지시간) 라울 의장과 부의장 5명, 서기 등 모두 31명의 국가평의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라울은 군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온 데다 지난 19개월간 와병 중이던 피델 대신 쿠바를 통치, 형제간 권력 세습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날 의장 취임 직후 라울은 형 피델을 ‘혁명의 총지휘관’으로 모시는 조건으로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수락한다고 밝혔다.

라울은 “중요한 모든 문제를 피델과 협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의원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라울은 이어 “피델은 피델”이라며 “피델은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설사 그가 여기 없더라도 우리는 그의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가 피델의 혁명이념을 계승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권력이 이양됐어도 쿠바 체제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측이다. 특히 평의회 2인자인 수석 부의장에 77세의 혁명 1세대 호세 라몬 마차도 벤투라가 선출된 것이 방증이다.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대신 구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마차도 벤투라가 부상하자 쿠바 국민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라울과 피델의 성격이 다른 만큼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적잖다. 평생 카키색 군복 차림이었던 피델과 달리 라울은 짙은 회색의 수트에 금테 안경을 쓰고 취임 연설을 했다. 몇 시간씩 속사포처럼 말을 퍼부어 대던 피델과 달리 라울의 연설은 30분간 평온한 어조로 이어졌다. TV로 연설을 지켜봤다는 주부 마리아 로페스는 “정치에 대해 얘기할 땐 다소 더듬거리던 라울이 경제 쪽으로 넘어가자 자신 있게 얘기했다”며 “그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말했다. 피델보다 카리스마가 부족한 대신 현실적인 경제감각을 갖췄다는 인상을 준 것이다.

라울은 당 2인자 시절 피델에게 쿠바의 농업부문을 개혁하자고 건의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쿠바가 적극적으로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정책을 펴게 된 데도 라울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라울은 이날 취임 연설에서 정부 개혁을 예고하기도 했다. “작은 정부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중앙정부의 관료 조직을 축소하고 지방정부에 권한을 이양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라울이 취임 초기엔 혁명 이념을 재천명해 체제를 단속하면서 당면한 경제난 타개에 주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과감한 개방이나 정치 개혁은 체제가 확실히 안정됐다는 자신감을 확보한 뒤에나 서서히 단행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분석가들은 “라울이 중국식 개방 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당면한 경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처럼 공산당 1당 독재를 확고히 하는 가운데 시장경제 체제를 점진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울은 과거 “쿠바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논의가 필요하다. 공산주의 체제에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경제 개혁에 상당한 의욕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아바나(쿠바)=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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