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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리 ‘청계천 헌책방’ 을 걷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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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오래된 거리에는 사연이 있다. 오랜 기간을 이어오며 그 곳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고 또 꾸준히 그 거리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에, 오래된 거리는 즐거운 문화가 있다.
동대문종합시장 길 건너편에 일렬로 자리 잡은 헌책방 거리도 그 중 하나다. 마전교에서 청계천을 따라 길게 뻗은 제일평화시장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래교가 보이고 안내도가 있는 지점부터 헌책방 거리가 시작된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헌책방이 다 사라진 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헌책방은 그 자리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물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을 떠난 헌책방보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책방이 더 많다.

40년 넘게 이어 온 민중서림 14호

마치 곡예를 하듯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려고 할머니가 의자 위에 올라가 책을 빼내든다. 많은 책이 빼곡히 쌓여 있어 책을 찾기도 힘들지만 책을 빼내기가 더 힘들어 보인다. 책 사이에서 단 한권의 책을 빼낼때도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만 같다. 정돈된 책들은 흐트러짐이 없다.
소설 전집, 외국 잡지, 학습교재, 사전 등이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빼곡히 쌓여 있다. 청계천에서 헌책방을 40년간 운영해 왔다던 노부부는 여전히 이곳을 지켜오고 있다. 가끔 예전에 왔던 손님이 찾아와 자신들이 여전히 이곳에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기도 한다고.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까지 풀어 놓고 간다는 것.
“나 아주 젊었을 때 책 보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 책 쌓아두는 걸 좋아했어. 여러권이 쌓여 있는걸 보는 게 나는 좋더라구. 그런데 내가 이렇게 책방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라며 미소를 띠는 주인 할머니. 매일 헌책방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귀가 잘 안 들리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답을 해준다고.

몇 십년간 주인을 기다리는 책

헌책방 안은 물론이고 바깥 거리에도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삼국지 전집’ 부터 오래된 외국 잡지도 꽤 많은 양이 있다. 손때 묻은 성경책이며 아동 동화까지 주인의 손을 기다리는 책들이 많다. 할머니는 꼭대기에서 교과서를 꺼내 주신다. 색이 바라고 너덜너덜한 ‘국어’ 교과서와 ‘수학’ 교과서. 뒷장을 보니 ‘1975년’ 이라고 적혀 있다. 현재 구입하려면 적어도 만원은 줘야 한다며 고이 책 속에 다시 넣는다.

“책을 고르는 재미, 책 속에서 찾는 보물찾기 재미도 쏠쏠”

헌책방의 즐거움이란 책을 고르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뒤따르는 재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추억까지 덤으로 얻는 일. 책의 표지나 뒷장에 유명인사의 사인이나 메모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1969년. 11월 23일. 존경하는 **씨께.” 라는 인사가 적혀 있는 책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곳에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을 선물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추억을 파는 곳이죠.”

얼마 전 청계천에 들르게 된 송왕섭 씨는 “청계천 복원 공사로 헌책방들이 전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을 보낸 80년대 경찰이 모아둔 책들을 압수수색해 걷어나곤 했다며 압수당한 책이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이 곳 청계천 헌책방을 들르면 다시 책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했다. ‘불온서적’으로 여겨져 금지됐던 책들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떡 하니 있는 경우도 있어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암울했던 시절, 가난하기 때문에 들르던 곳은 아니었다. 헌책방이 책들의 무덤이라면 죽은 영혼을 부활시키는 나와 또래들이 이곳 헌책방을 찾았다”며 요즘에는 예전의 이념 서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어린이용 도서전집이나 영어교재에 사람이 몰려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적어도 이곳은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추억을 파는 곳”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책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청계천 헌책방은 ‘문화가 있는 오래된 거리’로 남을 것이다.

* 이곳에 가면 전국에 있는 헌책방 소개와 지도를 볼 수 있다.

http://home.freechal.com/booklover

객원기자 장치선 charity19@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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