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奉昌의사 抗日일생 첫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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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32년 1월8일 도쿄(東京)에서 히로히토(裕仁)日王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항일독립투사 이봉창(李奉昌)의사가 일본측이 주장한 것처럼 『주색에 탐닉한 건달』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인물이었음이 처음으로 밝혀 졌다.
본사 현대사연구소 연구팀이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소장 李秀起)부산지소에서 발굴한「조선총독부 경비관계철」(총 1백20면)은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본경시청의 조사요청에 따라 사후대처방안을강구하기 위해 작성한 비밀문서철로 李의사의 친 .인척및 참고인조사등을 통해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李의사의 경력과 행적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일본측은 李의사가 1919년부터 24년까지 용산철도국 인부로일하다 주색에 탐닉하고 빚이 많아 퇴직한 후 건달처럼 지냈으며단순한 테러리스트라고 발표했었으나 이 문서는 24년 9월께 자신이 살고 있는 금정(錦町.지금의 용산구일대) 에서 3.1운동이후 전국적으로 결성된 청년단체와 같은 성격의 금정청년회를 조직하고 간사로 활동했음을 처음 밝히고 있다.이것은 李의사가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 문서에는 李의사가 체포당한 후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폭탄과 자금을 지원한 배후인물인 김구(金九)의 신원을 끝까지 숨기고 백정선(白貞善)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둘러대지만 일본경시청이진술의 위조여부를 밝히기 위해 집요한 수사를 펼 치는 장면도 현실감있게 묘사돼 있다.
새롭게 밝혀진 사실 가운데 주목을 끄는 대목은 李의사의 의거에는 김구 외에도 양이섭(梁履涉.1907년 평북 강계출신.임정관계자)과 이춘태(李春泰.1890년 평남 중화출신.임정관계자)라는 두 인물이 연루돼 있었다는 점이다.
李 東 炫 〈현대사전문기자.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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