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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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꽃잎은 떠 물 위에 흐르고(20) 어둠에 가려 화순의 모습이보이지 않게 되었다.파도소리만이 그녀가 사라진 어둠을 덮치듯 들려오고 있었다.야마구치는 술병을 한손에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가만있자,나도 누구처럼 저년한테 홀리는샤 거 아냐? 그럼 안되지,안 되구 말구.그는 화순이 사라져간 어둠에다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코,술 고맙다.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좀 나갔다가 이쪽으로 와! 바람이 거세서 위험하다구!』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파도소리에 섞이면서 화순이 사라져간 어둠 속으로 묻혀갔다.
『나도 모르겠다.무슨 일이야 있을라구.별수 없지,남은 술이나다 마시자구.』 그는 목을 뒤로 젖히며 술병을 들어 또 한 모금 마셨다.칠흑 같은 어둠이 천막처럼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잘계시오.그렇게 중얼거리며 화순은 걸었다.자신의 몸뚱이를 날려버릴 것만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그녀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잘들 계시오.
사람에게도 팔자가 있고,그럼,운명이 있지.그렇다면 나라에도 그런 게 있겠지.길남이 언젠가 했던 말을 그녀는 떠올린다.오리나무는 십리밖에 서 있어도 오리나무고,고향목은 타관땅에 서 있어도 고향나무다.사람이 갈 길이 멀다고 다 바늘허 리 매며 사는 건 아니다.
그런 말도 떠올린다.
그랬었지,너는.그러나 넌 바로 그 바늘 허리 맨 사람이 나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되지도 않을 일을,끝이 없는 일을내가 왜 저질렀는지 모르지.그러나 나도 알아.너를 만나 같이 한 시간은 짧고 짧았지만 그게 내게는 때때옷이고 꼬까옷 같은 세월,기다리고 기다렸던 날들이라는 걸 말이다.
고마워.고마웠어.
화순의 자살 소식이 알려진 건 그리고 이틀 후였다.바다에서 그녀의 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투신자살이었다.물에 부어 오른그녀의 몸은 그렇게 가고 싶던 조선으로 떠 가지도 못하고 섬쪽으로 밀려와,살아서처럼 파도에 밀리면서 차방파 벽에 부딪쳐 으깨어져 가고 있었다.아침 교대를 하고 점호를 마치고 돌아가던 경비원이 방파제 밑에 밀려와 바다에 떠있는 그녀를 보았다.두 팔을 벌리고 몸을 엎드린 자세였다.
섬으로 끌어올려진 그녀의 시신은 물에 팅팅 붓고,방파제에 부딪쳐 옷은 너덜너덜 찢겨 있었다.그러나 얼굴만은 깨진 부분도 없이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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