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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바이올린 복원전문가 앙드레아 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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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바로 이 시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선 이 방송을 지켜보던 한 노신사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탄성과 함께 무릎을 치며 연신 파안대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화면에서 바이올린 제작 전문가(파블리코프스키)가 “그로블리츠의 방식대로 만들어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이번엔 실소를 흘린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그로블리츠를 2년 전 거의 ‘고물’ 수준에서 오늘의 명품으로 ‘재생’시킨 것이 바로 자신이어서였다.

이 노신사의 이름은 앙드레아 방(한국명 方永昌·73). 스트라디바리·과르넬리·아마티·갈리아노 같은 서양 고전 현악명기(絃樂名器)의 세계적 복원전문가로, 명기를 다루거나 소유한 사람 치고 그를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들을 정도다. 그래서 그의 호칭 앞에는 늘 ‘마에스트로(Maestro·이탈리아어로 명장이란 존칭)’가 붙는다.

방씨는 현재 논현동에 ‘크레모나 인 서울(Cremona in Seoul)’이란 이름의 음리(音理)과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연구와 작업을 하고 있다. 크레모나는 17~18세기 아마티·스트라디바리·과르넬리 등 전설의 현악기 제작 3대 가문이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성지(聖地). 이곳에서는 지금도 프란체스코 비솔로티, 지오바타 모라시 등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의 거장을 비롯한 200여 명의 장인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 방씨를 ‘마에스트로’로 깍듯이 대접한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성공도 처음부터 보장돼 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1935년 일본 나고야에서 와세다대 출신 한국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방씨는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익힐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다섯 살이 되면서 도쿄 우에노로 옮겨 바이올린 공부를 계속하던 중 초등학교 3년 때 일본의 패전으로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면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서울에 본처가 있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이던 친구에게 맡겼다. 방씨는 경기중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양부모와도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시도 바이올린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품으로 가기 위해 무작정 부산으로 떠날 때도 달랑 바이올린뿐이었고, 도일(渡日)에 실패한 뒤 대구의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할 때도 그랬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던가. 그를 전쟁의 수렁에서 건져준 건 역시 바이올린이었다. 때마침 인근에 있던 공군정훈감실에서 실시한 군예술대원 공모에 최연소로 합격, 유엔군 위문공연 활동을 하게 됐다. 그에게 행운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51년 가을 맥아더사령부 고문단이 참관한 가운데 미8군 장교구락부에서 한 공연이 계기. 고문단의 실력자가 ‘바이올리니스트 쇼리’의 실력에 감탄해 그를 일본의 맥아더사령부로 초청했던 것이다. 도쿄사령부에서 두 차례 공연했는데 당시 군목(軍牧)이 “재능이 아깝다”며 파리행을 주선, 이듬해 초 열일곱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신학을 공부하며 종교단체에서 연주하던 그에게 두 달 만에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줄리앙르란 여성 신자가 신학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갈 것을 권하며 후원자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45세이던 그녀는 리옹 인근에 수천 평의 포도원과 대여섯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던 부자이자 사교계 명사로 그에게 숙식 제공은 물론 유명한 선생들의 개인레슨까지 주선해 주었다. 그가 가르침을 받은 스승만 파리에서 활동하던 물리켕, 퐁퓨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의 니콜로 야노프스키, 밀라노의 시베리오와 프란체스코 베르니, 암스테르담의 헤리거 등 10여 명이나 되었다.

이중 특히 독일계인 물리켕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명기 스트라디바리(1702년산)를 물려줄 정도로 그의 재능을 사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의 기량은 일취월장했고, 이를 지켜보던 마담 줄리앙르는 “명연주자가 되려면 명기를 다뤄봐야 한다”며 “명기라도 작품마다 소리가 다르니 다양하게 느끼고 경험하라”는 격려와 함께 각종 명기 바이올린을 마련해 주었다. 스트라디바리(1702년) 한 대, 과르넬리(1705, 1711년) 두 대, 아마티(1659년) 한 대, 루게리(1732년) 한 대 등 값으로 따져도 어마어마하지만(2005년 뉴욕 경매에서 스트라디바리 한 대가 203만2000달러에 낙찰됐다) 연주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것들이었다. 그는 유럽 각국을 휘젓고 다니며 수업을 강행하는 중에도 틈틈이 개인 리사이틀은 물론 55년 ‘비발디 현악 4중주단’을 구성, 종교·사교 단체를 대상으로 장애인 등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을 펼쳤다.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사이 어느덧 10년이 흘러 26세가 되던 61년 그에게는 또 한 번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초겨울이었습니다. 리옹에서 스트라디바리로 자선공연을 하는데 그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가 참석했어요. 공연이 끝난 뒤 그 양반이 ‘솜씨는 훌륭한데 소리가 노쇠해 글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도 죽으면 끝나지만 명기의 소리를 보전하는 것은 인류를 위해 영원한 문화유산을 남기는 일이라며 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명기를 많이 다뤄본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마음이 쏠렸다. 고민스러웠다. 인체를 알려면 해부를 해봐야 하듯이 박사의 권유대로라면 악기들을 부숴야 할 텐데 이미 자신의 일부가 돼버린 저들이 아닌가. 두 달을 끙끙거리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스트라디바리 한 대를 밟았다. 이어 과르넬리와 아마티, 루게리가 눈물 속에 가루로 변했다(독일이 국보로 치는 1647년산 스타이너, 50억원짜리 1705년산 과르넬리는 운좋게 살아남았다). 도료(塗料)에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슈바이처 박사의 충고에 따라 도료가루를 모아 노르웨이의 고고학자 노만 교수에게 자문을 했다. 노만은 도료가 천연물질이라며 르네상스시대 각종 천연도료의 유통 루트를 가르쳐 주었다. 즉시 탐색에 나섰다. 기니·세네갈 등 아프리카 동부와 인도·태국 등을 샅샅이 뒤져 16~17세기에 이들 지역에서 유럽으로 수출한 도료의 원료 30여 가지를 찾아냈다. 용도 실험을 거쳐 이중 10여 가지만 악기에 사용됐다는 점을 밝혀냈다. 곤충의 배설물, 열대식물의 수액, 로열젤리, 잣나무·커피 열매 등이 그것이었다. 문제는 배합 비율. 방씨는 악기를 부숴 얻은 가루와 비교하며 끊임없이 실험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300여 대의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부수기를 10년. 마침내 비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12가지의 원료를 사용해 목형(木型)의 상태에 맞추는 26가지의 배합을 완성한 것이다.

“악기의 소리가 완성되는 데는 목형이 30%, 도료가 70%를 차지합니다. 목형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스트라디바리 때보다 우수하지만 소리가 형편없는 것은 바로 도료 때문입니다.”

방씨는 70년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낡은 고전 명기의 복원은 물론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폴란드·체코 등의 악기 명장들과 손잡고 명품들을 재현해 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베를린·빈·뉴욕 필하모니 연주자들은 물론 특히 ‘제2의 파가니니’란 칭송을 받는 살바토레 아카르도한테서 “최고의 바이올린”이란 극찬을 받았을 정도다.

그가 지금까지 재현한 ‘명품’은 400여 대. 대당 10만 달러를 호가하지만 죄다 가톨릭 자선단체에 불우아동 돕기 기금용으로 맡겼을 뿐 한 대도 사리(私利)를 목적으로 팔아본 적이 없다. 자신의 혼이 담긴 예술품을 돈과 바꿀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방씨는 한때 자신을 버린(?) 조국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국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명성을 얻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이 든 뒤론 조국을 사랑하게 됐다. 한창 바쁘던 70년대 중반 간간이 고국을 찾아 자선연주회를 연 것도, 그를 통해 78년 지금의 부인과 결혼해 서울에 정착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비법을 조국의 후배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이다. <인터뷰 전문 보기>

글=이만훈 인터뷰전문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마에스트로’의 웃음

17일 서울 논현동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안드레아 방. 그는 1935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아’가 됐다. 네 살 때부터 익힌 바이올린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 가 연주자로 활약하다 스물여섯에 고전 명기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0년 만에 비법을 터득해 80년대 초부터 ‘마에스트로(名匠)’ 반열에 오른다. 92년 러시아 국영 TV에서 그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것을 비롯, 100여 개국에 소개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즉위에 맞춰 1년 걸려 만든 ‘부활’이란 이름의 바이올린이 교황청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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