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錫元회장 民自입당 배경-TK 끌어안기 고육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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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석원(金錫元)쌍용그룹회장실은 10대 소년의 공부방같다.여느회장의 집무실처럼 절대로 화려하지 않다.별다른 장식도 없다.사방을 뒤덮고 있는 것은 오직 자동차 모형들이다.남다른 그의 호기심을 느낄 수 있다.그는 젊었을 때부터 지프를 타고 다녔다.
때문에 그의 차는 호텔 정문앞에 세우지 못한 채 지하주차장으로가야 했다.재벌회장같지 않은 모습이다.뭔가 파격을 좋아하는 그다. 그가 정계에 입문했다.그는 4일 민자당 대구시달성군 지구당위원장을 맡았다.부친인 故 김성곤(金成坤)씨의 지역구를 24년만에 물려받은 셈이다.성곡(省谷)김성곤씨는 3공화국의 실력자였다.공화당 4인방중 한사람이었다.재정위원장을 맡으면 서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그러다가 71년 10.2항명파동으로 정계를 떠났다.엄청난 수모도 당했다.불명예스런 퇴진이었다.그는 그로부터 4년뒤 타계했다.그때 몇가지 유언을 남겼다.그중 한가지가 아들들에게『정치를 하지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金회장은 민자당의 제의를 처음에는 사양했다.자신은 사업에만 열중하겠다는 뜻을 누차 피력했다.그래서 민자당은그의 동생인 김석준(金錫俊)부회장을 영입하는 쪽으로 방침을 선회했다.그러나 그것은 金회장이 말렸다고 한다.정 치를 한다면 자신이 해야 된다는 얘기였다.
결국 金회장 본인이 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갔다.그렇다고 민자당이 강권(强勸)한 것은 아니다.김덕룡(金德龍)총장도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말했다.오히려 金회장이 흔쾌히 수락했다고 말했다.결국 처음의 사양은 의례적인 것이었다.
사실 金회장은 오래전부터 정치지향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보이스카우트일을 한 것도 그런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이 많다.달성.고령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그의 정계입문은 두가지 시각에서 봐야 한다.우선은 재벌총수의정치참여다.벌써부터 야당의 공세가 시작됐다.정경유착 운운하고 있다.정주영(鄭周永)씨의 예를 들고있다.사실 일관성을 결여한 측면도 있다.또다른 재벌의 정치참여를 불러올 가 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비를 金총장은 한마디로 일축했다.돈을 갖고 권력을 사려한 경우와는 다르다는 얘기였다.틀린 얘기는 아니다.
金회장이 돈을 이용한 적은 없다.민자당이 돈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시비가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민자당은 그가 재벌회장이기에 영입한 것은 아니다.김성곤씨의 2세란 점을 고려했다.달성에는 金회장의 부친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지역여론은 압도적으로 金회장의 정치참여를 바라고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곳은 민자당이 고전하는 경북지역이다.그뿐만이 아니다.구자춘(具滋春)의원은 민자당을 탈당,자민련으로 갔다.민자당으로서는 金회장 이외에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다.노태우(盧泰愚)前대통령의 아들 재헌(載憲)씨의 영입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그다.정치를 경제의 걸림돌로 여겨온 그다.정치판의 새바람을 기대해본다.그의 호기심과 파격추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李年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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