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 동맥 경화’로 기업 노화 우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전자 장비를 생산하는 M사는 올해 신규 채용 규모를 100명으로 정했다. 지난해의 절반도 못 된다. 직원들의 연공이 쌓이면서 불어나는 인건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당초 이 회사는 예년 수준인 300∼400명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임직원의 근속 연한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 계산해 봤더니 임금은 물론 각종 사회보험이나 자녀 교육비 지원 같은 부가 급여가 크게 늘 것으로 전망돼 신규 채용을 확 줄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채용 동맥 경화증’이 현실화하고 있다. 회사를 오래 다니는 사람이 늘면서 신규 채용의 문이 더욱 좁아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2015년을 전후해 베이비 붐 세대의 고령 인력이 대거 빠져나가는 ‘은퇴 쓰나미’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신규 인력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고령자들이 일거에 빠져나가면 숙련자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급속한 인력 고령화가 이런저런 면에서 기업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 에이징 패러독스(고령화 모순 )’가 산업현장 곳곳에서 불거지는 셈이다.

◇‘기업 노화’ , 커지는 부담=기업체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힘센 노조’가 득세한 업종에서 두드러진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단체협상에서 정년을 59세로 1년 더 늦췄다. 회사 관계자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해 노조와의 협의를 거쳐 정년을 늦췄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현대차 임직원의 평균 연령은 42세로 높아졌다. 이는 국내 주요 업종 중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조선업계(38.3세)보다 4년가량 많은 것이다. 자동차 업계는 생산 인력의 고령화에 따른 생산성 정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보고서(주력 산업의 인력 고령화 전망과 대응 방안)를 보면 ‘중고령 인력이 생산성에 비해 과도한 임금을 받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가 자동차 업종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정부 당국의 ‘인력 총수’ 제한을 받는 공기업들도 노조의 눈치를 보느라 신규 채용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니 당장 인력이 필요한 업체들조차 신규 채용을 꺼린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동률 투자고용팀장은“ 지난해 100명을 뽑은 서울의 한 서비스업체는 일손 부족에도 불구하고 올해 한 명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근로자 고령화로 인해 업무 효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여론도 커진다. 삼성경제연구원 배노주 수석연구원은 “연령대가 높은 직원일수록 정보기술(IT) 같은 신기술을 업무에 활용하는 정도가 낮다. 병가로 인한 작업 손실도 많다”고 지적했다.

◇투자·고용에도 먹구름=경직된 ‘고용 보호’는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다. 태미 오버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대표는 “ 주한 외국기업들은 고용 유연성 부족 때문에 신규 투자를 보류하거나 취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산업연구원의 이임자 전문위원은 “고용 보호 정책이 과해 기업체 고령화와 청년실업 문제를 동시에 악화시키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김기태 노사인력팀장은 “고령화 문제를 해소하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법·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과주의 임금 제도를 확산시키고 고령자 재고용 제도를 활성화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표재용·장정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