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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평>50代문화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0년대 후반 김동리(金東里).이어령(李御寧)간의 논쟁으로 시작된 신구(新舊)세대 간 문학논쟁은 60년대 막바지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됐다.논쟁의 내용과 성격은 달랐지만 이들 일련의 논쟁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문제를 제기하고 공격한 쪽 이 주로 20,30대의 젊은 세대였던 반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이에 맞서야 했던 쪽은 한결같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중반에 이르는 세대였다는 점이다.말하자면 중진(重鎭)혹은 원로(元老)로 불리면서 한국 문단을 이끌고 있던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파상적 공격이었던 셈이다.
우리 예술계,특히 문단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서열의식이나 도제(徒弟)의식 또는 권위주의를 감안할 때 나이로나 경력으로 10년 내지 20년이나 뒤진 후배들의 선배들에 대한 그같은 과감한도전은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60년말 최인훈(崔 仁勳)의 문제작『광장(廣場)』의 해석을 둘러싼 문학 논쟁에서 30대 초반의한 젊은 비평가가 당시 52세의 평론가 백철(白鐵)을「옹(翁)」으로 지칭한 일이 있었다.「옹」은 물론 노인에 대한 일반적 존칭이지만 젊은 비평가의 그같은 지 칭에는 우리 문단의「최고 어른」에 대한 외경심같은 것도 함께 함축돼 있을 법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무렵에는 김동리.백철.서정주(徐廷柱).조연현(趙演鉉).박목월(朴木月)등 50세 안팎의 문인들이 문학과 문단을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젊은 문인들이 논쟁을 통해 대선배 문인들을 거세게 몰아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중추적 위치까지 뿌리째 흔들지는 못했다.그들이 없는 한국의문학과 문단이란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50세 안팎의 예술인들이 주도한 것은 문단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50세 안팎의 나이는 예술가에게 있어선 황금기에 해당한다.인생을 관조할 수 있고,자신이 일평생 쌓은 예술적 업적을 총정리할 수 있는 완숙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평균 수명이 60세가 채 못되던 시절에도 그 나이에 대표작을 생산 해낸 예술인들은 얼마든지 있다.평균 수명이 70세에 이르고 50대를 「중년」으로 지칭하게 된 오늘날에는 그 가능성이 더욱 커진 셈이다. 그러나 오늘의 50대들은 어쩐 일인지 기가 죽어있고 힘이 없어 보인다.우리나라 뿐만 아니다.두어해 전「50대 중년의 위기」를 특집으로 다룬 뉴스위크誌는 50대가 실의에 빠져있는 까닭을「지금의 50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을 거부하 면서 인생에 대해 거창한 기대만 가지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우리의 경우 육체적 연령으로 따져 50대를 노인취급하거나「옹」으로 부르는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정신적으로는「옹」소리를 들어도 좋을만큼 오늘의 50대들은 피폐해져 있는 것이다.
예술계 각 분야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50대의 실종(失踪)은 실감있게 느껴진다.60대 이상의 원로층은 활동을 하든 안하든 그 위치에 걸맞은「대접」을 받고 있고,20대에서 40대 초반에이르는 세대들은 왕성하고 활기차게 그 분야의 예 술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50대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최근 정부내의 한고위 관리는「위에서는 내리 누르고,아래서는 치받는 위치」라는 말로 관료사회의 50대를 표현했지만 이 말은 예술계의 50대들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된다.문학분야만 보더라도 50대의 퇴조와 침묵이 너무 두드러져 거론하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러울 지경이다.한 50대 작가는『모르는 사이에 구경꾼으로 전락해 있는 나를발견하게 된다』고 한탄한다.
***예술계 早老化 우려 작년 10월부터 금년 2월초까지 폭발적 인기속에서 장기공연된 박정자(朴正子)의 연극『11월의 왈츠』는 그같은 현상과 관련해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50대여성 연기자가 출구없는 50대 여성의 내면을 그려냈다는 점,그러나 50대 여성도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 동년배의 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50대 문화」의 실종이 50대들을 서글프게,우울하게 한다면 그 부활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50대들에게 활력소가 될 것이다.「립스틱 짙게 바르고」연하의 남성과도 사랑을나누는 박정자 연극의 주인공처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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